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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 – 또 다른 가족

20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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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가족

 

글/ 홍순복

 

 오늘은 그린이 외삼촌 내외와 외할아버지를 만나는 날이다. 아이의 할아버지는 한 달에 한번 손녀를 만

날 때 마다 용돈으로 100불짜리 지폐를 쥐어준다. 나도 할아버지를 만날 때 같이 가기도 하는데 지난달

엔 볼 일이 있어 남편과 그린만 갔다. 남편은 그날 할아버지가 에미는 안 왔느냐고 물었다는 말을 하며

당신 손녀딸을 잘 키워주고 있으니 딸같이 생각이 되는 모양이라고 하며 웃었다.

 처음 할아버지를 대면하던 날 우리 미니밴에 함께 타고 가다가 남편과 그린이 미니마트로 음료수를 사

러 들어갔다. 할아버지와 나만 남겨지자 차안엔 잠시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 가끔 턱없이 용감한 끼를

발휘하는 내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그린이 생모가 인천출신으로 나와 같은 여고를 다녔기에 나는 그곳

얘기로 대화를 풀어갔다. 할아버지는 고향이 이북이지만 피난 나와 산 곳이 인천이라는 말과 어디 어디

를 아느냐며 기억을 더듬었다. 딸과 아내를 차례로 앞세워 보내고 엘에이 노인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가

는 할아버지는 90세라고 믿기지 않게 관절 하나 아픈 곳이 없는 건장한 영감님이다. 우리를 만날 때면

일반 식당보다는 갤러리아 마켓 푸드코트에 가는 것을 즐기신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된장찌개를 시켜

반은 먹고 반은 남겨서 집으로 가져온다. 할아버지는 노인아파트 앞에 도착하면 당신 방으로 올라가자

고 하신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노인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안에는 티비,소파,농짝. 그 위에 놓인 성모상과

촛대. 과자봉지 따위들로 작은 리빙룸이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하다. 도우미 아줌마가 청소를 해서인지

그런대로 깨끗은 했다.

할아버지는 냉장고 문을 열고 주스와 말라버린 떡을 꺼낸다. 그리고 반쯤 먹다 만 과자와 검은 색이 나

는 바나나 등과 함께 주섬주섬 봉지에 싸 준다. 처음엔 멋모르고 갖고 온 주스를 마시다 맛이 이상해서

보니 유효기간이 몇 달이나 지난 거였다. 받아 올 생각이 없었지만 할아버지가 서운해 할까봐 일단은 집

에 가져와서 버릴 것은 버리고 먹을 만한 것은 먹고 했다.

그린은 먹지 말라고 눈을 끔벅거려도 딱딱하게 굳어버린 크림빵을 한입 베어 물고 우물우물 하더니 꿀

떡 삼켰다. 밖에 나와서 그걸 왜 먹었느냐고 했더니 할아버지가 슬퍼할 것 같아 억지로 먹었다고 했다.

그린은 속이 깊은 아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린 외삼촌네와 만나기로 한 곳은 ‘길목’이라는 구이 집이었다. 와싱톤 블러버드

와 웨스턴 에비뉴에 있는 노인 아파트에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우리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으니 잠

시 후 그들이 도착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 오늘은 우리가 쏠 테니까 많이 드세요.”

 그린이 삼촌은 그렇게 말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술과 담배를 많이 해서인지 그의 피부는 검고 입술은 푸르스름했다. 예상대로 간이 조금 좋지 않아 요즘

은 주량을 줄였다고 했다. 지난해 보다 얼굴이 꺼칠하고 안돼 보였다. 매캐닉 답게 손에는 기름때가 조

금 묻어있었다.

고기가 익어가자 그는 자기가 먹던 젓가락으로 휘휘 뒤집더니 내 접시에다 한 점 놓으며 어서 먹으라고

했다. 남미에서 살 때 영국유학도 다녀온 지성인이 어찌 음식문화는 한국식 그대로 인지 모른다. 모든

음식을 자기 접시에 덜어먹는 미국식에 익숙해진 나에게 그의 친절은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몇 차례 참

아내다가 곁에 앉은 그의 부인에게 슬며시 말했다.

 “ 집게로 하면 되는 데…….”

 그녀는 이 사람은 누구 말도 안 들어요, 하며 집게로 고기를 뒤집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젓가

락으로 아직 익지 않은 고기를 뒤집으며 계속 열변을 토했다. 그의 입에서 침이 고기 판으로 튕겨져 나

왔다. 그래도 어려운 관계라 더 이상 말도 못하고 나는 야채만 집어 먹었다.

 남편은 우리 결혼식에 그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허지만 그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꼭 참석하고 싶다고 전

화를 했다. 그들은 남편에게 이제는 좋은 사람 만나라고 만날 때마다 이야기 했다는데 막상 남편은 선뜻

말하기가 조금 그랬다고 했다. 아무튼 두 내외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남편도 나도 고마워했다.

 지금까지 두세 번의 만남에 불과하지만 마치 오래된 가족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린의 외삼촌과 나는

나이도 비슷해서 한국에서의 생활(인천에서의)을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나누었다.

식사가 끝난 후 그린의 외삼촌은 이집의 물김치가 맛있다며 웨이츄레스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한 그릇

싸달라고 하더니 나에게 주었다. 다음에는 집으로 불러 바비큐파티를 해준다고 했다. 그 집은 특별한 음

식은 그린이 외삼촌이 만든다는데 오늘처럼 자기 입에 들어갔던 젓가락으로 뒤적거린 바비큐를 어찌 먹

을까 지레 걱정이 되어 쓴웃음이 났다.

시간이 늦었다.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발렛 파킹한 차를 기다리며 서있는데 그린이 외삼촌이

내 뒤로 다가서며 말했다.

" 그린이 키우느라 힘드시죠?"

그의 큰 손이 내 어깨 위에 놓이더니 힘 있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자기 누나대신 조카를 기르는 나에게

어깨 마사지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마웠다. 온몸의 피로가 풀렸다.

 

2011년 4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