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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권의 영혼의창-춤추는 포로

201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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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포로

 

수업을 하러 집을 나서면 가을을 향해 가슴을 연 다정한 길이 나를 맞이합니다. 그

길 위에는 하얀 꽃잎이 실바람에 빙그르르 머리 위로 떨어지고, 밤송이만한 벌새가

늘어진 시간을 분주히 깨웁니다.

내 발은 어느새 사뿐히 스텝을 밟고 어깨는 낮게 들썩이며 춤을 춥니다. 어제는 샤

롯테 처치(Charlotte Church)가 부른 ‘기도’(The Prayer)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눈물

을 흘렸습니다. “오 나를 인도하시는 주여, 나를 노래하는 자리로 이끌고 가소서”라

는 가사부분에서 거대한 은혜가 영혼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춤을 추다보니 예수님을 묵상하는 영성모임인 하트테이블(Heart Table) 초창기에 얼

바인에서 오시는 이 집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커피 향 가득

한 라 미라다 파네라 카페에 둘러앉은 우리들에게 이 집사님은 이렇게 고백했지요.

“저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란 예수님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한마디로 인해 그날 모임은 예수님과 춤추는 신부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며

행복했습니다.

이 집사님의 그 고백은 성령이 주신 지혜로 한 말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과 예수님, 성령님 삼위일체의 중심에는 기쁨과 즐거움, 곧 춤추는 은혜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요 19:30)라는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 말씀처

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에 삼위는 춤추는 것입니다. 원수가 굴복하고

예수님의 발판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시 110:1), 그 확실한 승리 때문에(골

2:14~15) 춤추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지나고 교부시대에 교부들은 삼위일체를 언급할 때 헬라어로 ‘페리코에

리시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단어에는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그 택하신 성도들

을 중심에 두고 둥글게 춤을 추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어떤 원수도 그 울타리 안으

로 근접할 수 없지요.

또한 ‘페리코에리시스’는 예수님의 은혜가 부르신 자들의 삶을 어떻게 인도해 가시

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채찍질하고 상벌로

다뤄 가시는 늙고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사랑하

는 사람의 몸에 암이 있으면 그 암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단을 그토록 미워하시고 죽음과 부활로 이기신 이유는 성도들을 미치도록 사랑하

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리라(시 103:5)는 시편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독수리처럼 새롭고, 백향목처럼 늘 푸르른(히브리어로 ‘라난트’,

시 92:14)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택하신 자들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계십

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가 받은 이유(요 14:27)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춤추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주님이 원하지 않는 길로 걸어가지

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춤을 추시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손과 스텝을 예수님의 은혜로 끌어당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입

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는 로마서 말씀이 아름다운

것은 이처럼 우리 삶의 주도권을 예수님이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하신다는 고린도후서 2장 14절의 말씀을 NLT 성경버전은 원문에 잘 맞게

번역해놓은 듯합니다. NLT 버전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게 하는 주도권과

책임이 하나님께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로(captives)로 만드셔서 이

끌고 가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성도들은 그리

스도의 사랑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던 애굽의

포로 신분에서 벗어나 이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벗어

날 수 없는 시편 23편 6절과 같은 은혜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어떤 때는 광야를 헤매다 다리가 부러진 어린 양처럼 절망과 고통으로 주님을 찾을

아무 힘조차 없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조차도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5장 5절의

비유처럼 주저앉은 성도들을 자신의 어깨에 들쳐 메고 집으로 돌아오십니다. 우리

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되어 신

부로, 아들로, 거룩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변했다는 그 신분 때문에 이런 축복이 주

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그 세상을 내 힘으로 해결하고 다루려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

닙니다. 세상을 이기시고 우리의 손을 잡고 춤추시는 그 아름다운 예수님의 눈을 바

라보고 또 바라보다보면 주님의 몸 된 교회된 우리들은 어느새 우리의 발판이 되고

있는 사단의 실체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차명권 전도사(온누리교회, HEART min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