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메뉴바로가기
     

개울건너 오두막-가혹한 질문

2013.12.05

상세 본문

가혹한 질문 / 이용우

 

  박 선생님은 올 해 구십 일 세가 된 노시인이다. 전에는 모임에도 잘 나오셨는데

이제는 바깥출입이 용의치 않아 집에만 계시므로 가끔 전화로 안부를 여쭙곤 했는

데, 마침 토요일 오후의 맑은 날씨가 박 시인을 생각나게 하여 전화를 했다.

 박시인은 힘은 없지만 반가운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내가 의례적인 안부의 말과

함께 인사치례로 한 번 들를까요, 했더니 반색을 하며 지금 오라고 했다. 대게 그렇

게 말하면, 컨디션이 좋아지면 한 번 보십시다, 하던 분이 오늘은 어쩐 일일까 하며

그러나 노시인의 음성이 몹시 간절하게 들려서 계획에도 없던 엘에이 나들이를 하

게 되었다.

 행콕팍에 있는 박시인 댁에 도착하여 초인종은 누르니 60대의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이층 난간에서 내려다보던 박시인이 어서 올라오라고 손짓을 했

다. 이 층에 올라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보니 박시인은 그 동안 몸이 많이 쇠약해

져서 누가 부축하지 않으면 보행이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런 박시인이 석 달이 넘도

록 바깥출입을 못했다며 자신을 밖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조금 염려는 되었지만

부탁이 없어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마음이었기에 도우미 아주머니의 염려를 뒤로하

고 박시인을 부축하여 한인타운으로 나갔다.

 3가에 있는 일식당에 자리를 잡았는데 음식주문을 마치자 박시인은 슬며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 선생, 내가 앞으로… 일 년이나 더 살라나하는 마음이 드는데… 보기에… 어떻

소?”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자신이 일 년은 더 살 것 같아 보이느냐는 물음이었다.

“선생님, 노인은 감기나 폐렴으로 해서 겨울나기가 힘듭니다. 겨울만 지나면 한 해

넘기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요. 이제 겨울을 잘 보내셨으니 올 한 해는 걱정 마시고

다음 겨울맞이나 준비 잘하세요.”

 나는 좋은 말로 노시인을 위로하며 문득 이런 기회에 그 동안 마음속에 두었던 질

문을 드려보자는 용기가 생겼다.

 “박 선생님, 지금 선생님께서 먼저 그렇게 생과 사의 경계에 대해 언급을 하시니까

제가 용기를 얻어서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꼭하시고 싶은 일이나 아니면 남기실 말씀 같은 것은 없으신

가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잘못 받아들이면 오해를 사고도 남을 말을 그렇게 거침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박시인과 25년 전 같은 문예지로 함께 등단했다는 인연 외에, 수십 년의 나이

차이를 넘어 서로의 가정 사까지도 훤히 알고 있을 만큼 막역한 사이이기 때문이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말을 해놓고 판결을 기다리는 수인처럼 마음을 졸였

다.

 “이 선생, 그런 말을 해주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시선집을 내는 것입니다… 급할 것은 없고… 내가 죽은 후에라도… 이 선생이 그 하

나를 맡아준다면… 그러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진지한 표정의 박시인이 거듭 감사를 표하며 그렇게 말해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후

련히 내쉬었다. 이미 시집을 4권이나 내신 분인데 그것을 정선하여 선집으로 내시고

싶다는 말이었다. 내가 우정 묻지 않았더라면 그런 무거운 부탁을 자신이 먼저 꺼내

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박시인의 1남 3녀 중에 자기 아버지가 시인 인 것을 자

랑스러워하는 자식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든

구십 고령의 노인이다. 어렵게 던진 나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시선집을 내고 싶다는

박 시인의 간절한 소망은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사장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8년 전 병사한 전부인의 투병말기에 그녀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면서도 환자에게 상처가 될까싶어 마지막 말을 물어보지 못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지난 후에 생각하니 가혹하더라도 그때 용기를 내어 그녀의 심중에 있는 생각을 들

어두었더라면, 내가 마음에 새겨둔다거나 아니면 해야 할 일이라도 있었을 탠데 하

는 후회가 끊이지 않는다. 물론 말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한 점 혈육인 딸아이를 잘

키워야하는 것이야 온전히 나의 몫이지만, 그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분명 있었을 것

이었다.

 지난 이 삼년을 전후하여 시와 소설에 있어 미주문단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

는, K시인과 S소설가가 차래로 이 땅을 떠났다. 그래도 K시인은 세수가 어지간했지

만, S소설가의 하직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모두들 놀라고 아쉬워했다. 그

런데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 두 분이 모두 자기의 죽음에 앞서 가족이나 지인들 누구

에도 마지막 말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입원직전까지 왕성하

게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당사자나 가족 모두가 한 쪽은 설마 내가 죽으랴, 다른 쪽

은 차마 환자에게 마지막 말을 물어볼 수 있으랴, 하여 서로가 공허한 희망만을 주고

받다가 끝나버린 것이다. 어느 한쪽이라도 냉정하고 가혹한 용기를 내었더라면 한

평생을 오직 문업 한 길에 몸바쳐온 분들로서, 일생의 경험이 농축되고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었을 ‘한 말씀’이 분명 있었을 것이었다.

 박시인은 댁으로 가는 차 안에서 시선집 출판비용을 당신자식들에게 부담하도록

말해두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다음의 문제였다. 나는 다만 박시인에게 가혹한 질문

을 한 대가로 그의 시선집 출판을 떠안게 되었고, 그 약속이 생의 경계에 선 노시인

에게 공허한 희망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