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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로즈힐에서

201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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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힐에서/ 이용우

 

 재발한 지병으로 일 년 여간 투병하던 수필가 C선생님이 그예 돌아가셨다. 올 겨울

은 넘기실까 하는 덧없는 기대를 저버리고, 여든 생신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나셨

다.

이곳에 사는 한국 사람들의 장례풍습은 전날 저녁에 입관예식을 하고 다음날 낮에

장례를 치르는 것이 보통인데, C선생님의 경우는 낮 한 시에 채플에서 입관예배를

하고 곧바로 장지로 이동하여 하관예식을 거행하는 순서로 일간신문에 부고가 실려

있었다.

 나는 오전근무를 마치는 길로 로즈힐 공원묘지를 향해 서둘러 달려갔다. 넓은 채플

이 주류 정치인들과 한인사회의 유명 인사들을 비롯한 문상객들로 가득했다. 문인

들도 삼십 여명이 넘게 참석해있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앉아 저만치 앞쪽에 놓여

진 관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진행되는 순서를 지켜보았다.

 

C선생님은 여자 혼자의 몸으로 세 딸을 훌륭히 성장시켜서, 큰 따님은 이름만 대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주류사회의 유명 정치인으로 키워내시고, 당신 스스로

도 자기 개발에 열성을 다하여 수필가로서의 뚜렷한 족적을 미주문단에 남기셨다.

 

 C선생님은 강하고 매서운 성품 이면에 한없이 여리고 따듯한 심성을 함께 소유한

분이다. 아이 엄마 생전에 암 치료를 잘한다는 의사에게 손수 데려가기도 했고, 좋

은 것 사 먹이라고 내 손에 돈을 쥐어주시기도 했다. 아이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에

는 어린 딸 키우는 홀아비 가엾다고 그린과 함께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맛난 것을

사주시기도 했다.

 

 실향민인 C선생님은 향수를 달래느라 집 뒤 정원에 닭장을 짓고 장 닭 한 마리와

암탉 대여섯 마리를 키웠는데, 어느 날 문학 모임에서 만난 나를 당신의 자동차로

잡아끄시더니 손수건에 돌돌 말아 싼 달걀꾸러미를 내미셨다.

 

 대추가 여물고 감이 익을 때면 문우들을 롤링힐스의 자택으로 초대하여 앞뒤 뜰에

흐드러지게 열린 과일을 따 먹이고 한 자루씩 지워 보내는 재미로 가을을 기다리는

분이다. 그런데 그 재미가 지난해에 이어 올 해도 없었다. 아니, 이제는 영원히 없을

것이었다.

 

어느덧 입관예식이 끝나고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시간이 되었다. C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두어 주전에 다녀오신 분이, 머리는 하얗게 쇠었지만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곱더라고 한 말을 떠올리며 앞으로 나아갔는데 관이 닫혀있었다. 대신 평소의

해맑게 웃으시는 고인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앞의 문상객들처럼 잠시 고개를 숙이

고 묵념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할 짓이 없어진 나는 아까부터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는 큰따님 앞으로 다가갔다.

 

 어머니가 선생님 말씀을 얼마나 많이 하셨는데… 그녀는 나를 보더니 더욱 서럽게

눈물을 쏟으며 그렇게 말했다. 투병중의 C선생님이 약한 모습을 보이기라도하면,

힘을 내야지! 힘을! 이래가지고 어떻게 병을 이겨! 라며 자신이 거꾸로 엄마가 된 것

처럼 매섭게 독려했다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역할이 뒤바뀐 연극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서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경주하고 그 끝에 다다른 것이다.

나는 아무런 위로의 말도 못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채플에서 불과 일 이분 거리의 장지에 도착하니 많던 사람들은 다 돌아가고 가족들

과 가까운 친지들만 보였다. 사정이 있어서 시간이 그렇게 잡혔겠지만 어쨌든 시장

한 문상객들은 채플을 나서며 받아든 식권을 들고 지정한 식당으로 몰려갔을 것이

었다. 나는 그럴 줄 알고 떠나오기 전에 간단히 식사를 하고 왔다.

 

하관의식은 입관예식보다 훨씬 간략해서 짧은 순서를 지나 관이 내려지고, 헌화에

이어 가족들의 취토를 끝으로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 나도 문인을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선생님 편히 쉬세요, 하며 흙 한 삽을 뿌렸다.

 

장례를 담당한 한인 직원이 이제 의식이 끝났다며 모두 돌아가시라고 했다. 직원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때쯤에는 가족 몇 사람 외에는 그곳에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

었다. 그렇게 마무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관이 내려진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고인의 막내딸이 관이 놓여 진 상태가 이상하

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머리 쪽의 위치가 발치보다 낮다는 것이었다.

 

 슬슬 발길을 돌리던 사람들이 다시 구덩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도 그 틈에 고개

를 들이밀었다. 언 듯 보아서는 잘 모르겠는데 산의 경사도를 계산하며 들여다보니

과연 머리 쪽이 낮았다. 둘러선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렇다는 의견에 말을 모았

다. 그러자 문제를 지적한 막내딸이 둘러선 이들 중 한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이모부, 저희는 손님들께 인사하러 식당에 가야해야하니까 이 문제는 이모부가 책

임지고 감독해서 수평이 맞도록 수고 좀 해주세요. 알았지요?-

 

이모부라고 불리운 칠십대의 남자는 사람 좋은 얼굴로 그래, 알았다, 여기 걱정일랑

말고 어서 손님들에게 가보아라, 하고 선선하게 대답했다.

 

유족들의 단호한 태도에 난감한 표정을 짓던 한인 직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매장

작업을 하는 남미계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의논을 했다. 나는 바닥을 고르게 하려면

아무래도 내려진 관을 다시 들어 올려야하지 않을까, 그러면 일이 커지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허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일은 아주 쉽게 해결되었다. 아까 석관의 뚜껑

을 덮을 때 이용되었던 레카 차가 다시 돌아와 낮은 쪽 관 밑으로 밧줄을 내려 걸더

니 매장인부의 지시에 따라 조금씩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모부라는 사람에게 이정

도면 되겠느냐고 물어가며 그 밑으로 흙을 퍼 넣었다. 그렇게 들어 올린 관 밑으로

몇 차례 흙을 밀어 넣어 결국 수평을 맞추었다.

 

 수평을 맞춘 후부터의 매장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레카 차가 물러가고 포

크레인이 부릉거리며 달려오더니 옆에 쌓인 흙을 단숨에 쓸어넣고는 우람한 무쇠

손으로 꾹꾹 눌렀다. 마지막으로 인부들이 바닥 다지는 기계로 타다닥, 타다닥, 들

뜬 흙을 두드리는 것으로 매장작업은 모두 끝이 났다.

 

 나와 이모부라는 이를 포함해 그때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너 댓 명에 불과했다. 우

리는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시장하실 탠데 어서 식당으로 가십시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식사했습니다, 라는 말 대신 예, 어서가시지요, 라는 애매한 대답으로

얼버무리며 저만치 보이는 로즈힐의 정문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혼자서도 찾아올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도록 여러 번 쉬운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그런다고

쓸쓸한 마음이 달래지는 것은 아니지만.

 

2011-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