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건너 오두막-유통기한
2014.01.26상세 본문
유통기한/ 홍순복
오늘따라 노인은 기력이 쇠잔해 보였다. 나는 뒤를 따르며 힐끗 그의 뒤통수를 바라 보았다. 가운데 머리가 포마
드를 바르고 빗으로 갈라 놓은 듯 길이 나 있었다. 잠을 자고 머리를 매만지지 않은 것이다. 지난번 까지도 93세
노인답지 않게 성큼성큼 걷는 모습이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걸음이 굼뜨고 허리는 조금 내려 앉은 듯 큰
키가 줄어든 것 같았다. 지난 겨울에 사드린 밝은 색 순모 스웨터는 어디 두고 얇은 홑겹 같은 군청색 면 잠바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검게 염색해서 얼굴의 나이와 색깔이 어색해 보였다.
그린은 할아버지가 준 보따리를 카트에 싣고 우리를 앞질러 갔다. 이번엔 무엇을 주신 건지 궁금했다. 그 짐 속
에 얼마나 상한 것들이 많을지 걱정이 앞섰다. 대충 셋이서 나눠 들고 내려 올 수 있는 데 짐이 많으니까 카트에
실어준 것이다. 그린은 만날 때마다 할아버지가 주는 100불 용돈이 생기는 날이라 평소에는 투덜대며 하던 일도
오늘은 발걸음이 힘차고 즐겁다.
노인을 모시고 우리가족은 엘레이의 한인타운에 있는 Y설렁탕 집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테이블 몇 개인
식당 안엔 이미 두 사람이 이른 저녁을 들고 있었다. 국물이 맑다는 것을 자랑하는 집이다. 어디는 커피에 타는
크림을 넣어서 국물이 뿌연 거라는 소문이 나있다. 지난번 타 주에서 온 손님들과 만나 먹었던 곳이다. 다른 반찬
은 없고 깍두기와 배추 김치가 큰 사발에 담겨 나와 먹는 손님들이 직접 가위로 잘라야 한다. 김치 맛과 국밥이
정갈해서 이번엔 내가 그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노인은 살코기설렁탕을 시켰다. 남편도 같은 걸로, 딸은 갈비탕을 원했지만 메뉴에 없어 차돌박이 설렁탕을 시
켰다. 나는 탕 종류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지난 번처럼 따로 국밥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 까지 노인은
늘 상 같은 이야기이다. 당신은 험한 육체노동을 안 해서 관절에 문제가 없다는 건강이야기다
여느 때와는 달리 노인은 설렁탕에 밥 한 공기를 다 말았다. 그리곤 고개를 빠트린 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
다고 식사 속도가 빠른 것은 아니지만 함께 먹는 우리들은 조금 답답했다.
많이 드세요, 하면 머리를 들고 그래, 라고 짧게 대답을 했다. 그럴 때엔 입안에 들었던 음식물이 우리에게 튀었
다. 얼굴은 깊게 패인 밭고랑처럼 접혀 있고 그 사이엔 명암이 짙게 드려져 있다.
식사를 하던 노인은 갑자기 살코기 몇 점을 건져냈다. 건져진 고기엔 밥알이 묻어 있었다. 아마도 그 고기는 집
으로 가져 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집으로 가져가실 것은 하나 더 주문할 테니 그것은 그냥 잡수세요, 라고 했다.
음식을 다 먹어갈 쯤에 웨이츠레스가 투고박스를 가져왔다. 그런데 노인은 내 손에 있던 투고박스를 달라고 하
더니 김치그릇에 뚜껑을 열고 아까 꺼내낸 고기 조각을 얼른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말릴 사이도 없이 플라스틱
뚜껑을 닫으려 했지만 내용물이 많아져서 뚜껑이 닫혀지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노인이 내 아버지였다면 그 밥알 뭍은 고기를 벌써 빼앗아
버렸을 텐데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두 끼는 들고도 남는데 그런 것은 뭐로 가져가려고 하세요?”
남편과 나는 동시에 합창을 했다.
“이 괴기가 아까워서, 가져가야지. “
노인이 되면 고집이 세지나 보다.
나는 일어나 투고박스를 하나 더 얻어왔다. 밥알이 뭍은 그 고기조각들을 김치그릇에서 꺼내어 새 그릇에 담았
다. 그제야 웃음 없던 노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음식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되야. 거시기 이북은 야 굶어 죽는데 말이야. “
차 안에서도 설렁탕 박스를 바닥에 놓으면 편할 텐데 그것을 끌어 앉고 있었다. 나는 노인에게 오늘 어디 아프시
냐고 물었다. 그제야 유통기한이 지난 것을 먹고 탈이 났다고 했다. 오늘은 약 먹고 다 나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분명 아까워서 드신 것 같았다.
“날짜를 잘 보셔야죠. 아무거나 드시니까 탈이 나지요.”
제발 오래된 것은 저희에게 주지 마세요. 라고 속으로 말해봤다.
나는 차 안에 실린 보따리가 궁금했다. 무얼 그리 많이 챙기셨는지. 이번에도 준다는 것을 거절 할까 봐 먼저 싣
고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어디다 펴놓고 유통기한을 볼 수 없고 집으로 들고 와야 한다. 절반은 버려지는 것들이
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린에게 일주일에 한번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다. 아무리 건강해도 100세까지
살지는 못할 것 같다고 하자 그린은 눈에 눈물이 글썽이며 그런 소리 하지 마 슬퍼져, 라고 했다. 그렇지만 사실
인걸 어쩌냐고 말하자, 별안간 그린은 층계에 앉아있는 구찌녀석을 번쩍 안아 제 얼굴에 부비면서 오래 살아 구
찌, 응! 아이러브 마이 베비! 라고 하며 꼭 껴안았다. 녀석은 알아들었는지 어쩐지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준 보따리를 열고 유통기한이 지난 것은 버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검게 된 바나나가 , 묵직한
봉투 속엔 햄버거 고기가 차 안에서 이미 따뜻해져 신선도가 떨어져 먹기에 꺼림직한 것, 언제 건지 돌같이 딱
딱한 떡, 시든 미국배가 있었고 햇반은 날짜가 겨우 3월까지며 몇 개는 유통기한이 1년 전 거였다. 언젠가 이 많
은 것을 다 사시나요? 라고 물었을 때, 어떤 것은 마켓에서 도네션을 받아간 복지센터가 노인들에게 배급한 것이
고, 며느리가 사준 것 그리고 당신이 산 것도 있다고 했다. 눈이 어두워서 날짜를 못 보는 지도 모른다. 냉장고에
오래 두고 손녀딸을 만날 때 주고 싶어 모아 둔 것 같았다. 나도 안경을 써야 작은 글씨를 읽는데 귀찮아서 노인
이 준 과일 주스를 의심 없이 마신 적이 있다. 그러나 액체가 맑지 않고 껄죽해서 기분이 이상해서 보니 몇 개월
이 지난 것이었다. 그때부터 무엇이든 꼼꼼히 유통기한을 확인하게 됐다.
나는 부엌 캐비닛을 열었다.쓰지 않는 물품들을 끄집어 냈다.사용하지 않는 것은 분명 유통기한이 지났고 내 것
이 아니다. 옷장도 열었다.1.2년 넘게 입지 않은 것들, 사서 장 속에 넣어두어 잠자는 것도 있었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가면 새로운 유통기한이 시작 될 것 이다.
2013.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