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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어디쯤일까

201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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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쯤일까/홍순복

책을 보다 잠이 든다. 반시간만 자면 좋으련만 두어 시간이 지난다. 운동을 한 후 점심식사를 마치면

자동으로 소파에 등을 댄다. 식곤증인지 매번 나른하니 꼭 병든 닭같이 눈만 꿈적이며 움직이기 싫다.

뒤뜰 울타리 너머 무궁화 두 그루엔 잎이 무성하다. 엊그제 가지를 친 것 같은데 시간이 꽤 지났나보다.

우리 집 강아진 제 몸 관리를 할 줄 안다. 뙤약볕에 누워 일광욕을 한다. 비타민 D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 그래서인지 털 빠진 등위엔 검버섯이 사방에 피었다. 녀석은 나보다 영리하다.

그냥 하루 반나절은 맥없이 시간을 보낸다. 내 시선을 이층 층계로 돌린다. 계단위에 쌓아둔 책위엔

두터운 먼지가 자욱할 텐데 매일 청소를 한다고 마음만 먹었다가 내일로 미룬다. 거미줄은 여기저기

쳐있다. 남편은 낚싯대에 자기 양말을 뒤집어 씌어 거미줄을 제거했는데 그도 힘겨운가보다. 빨래를

개키며 텔레비전을 보던 날들은 옛날이다. 나라도 해야지 하면서 미루는데 이력이 났다.

아침에 해독주스를 먹고 나면 금세 허기진다. 뭐라도 집어먹어야 하는데 하기가 귀찮다. 함께 밥 먹을

사람이 없다. 딸도 기숙사로 가버렸고 남편은 늦은 저녁을 간단히 때우니 숟가락 소리 내며 이야기 할

사람이 없다. 그저 전화로 밥 먹었어? 서로 묻는다. 요즘은 맥반석 달걀에 꽂혔다. 휘슬러 밥솥에 적당한

물에 계란을 깔고 시간 반을 기다리면 흰자가 갈색으로 변하고 쫀득거린다. 콜레스테롤이 없어진다고

해서 두 개씩 싸주면 남편은 행복해한다.

퇴근해 돌아온 남편이 내게 묻는다. 오늘 뭐했어? 하면 음….운동하고 누구 만나고 집에 있었어. 먹고

살기위해 애쓰는 그에게 무슨 답을 할지 모른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조크를 던진다. 쉬엄쉬엄 하라고

한다. 고맙다. 진심일 거다. 괜히 집에서 논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 다 하지 못해서이지 집안일이 널렸다.

수제비하나를 끓여도 양파, 다시마, 멸치 그리고 무를 넣고 우려내는 일만해도 시간이 간다. 남편은

맛있어, 한다. 그러면 나는 조리법을 공개한다. 잘난 척하는 것이다. 맛있게 먹는 사람 앞에서, 괜찮아?

묻는다. 응, 맛있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그도 영리하다. 칭찬을 하면 더 맛있게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두부 반모를 프라이팬에 부치고 신선한 페르시안 오이를 엇비슷하게 쓸어 놓고 색깔을 위해 당근도,

레몬도 두어 쪽 장식해 놓으면 그는 여자처럼 어머, 멋지네, 하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내 나이 59세, 50과 60 경계선에 서있다. 내게 약속을 했다. 올해는 그냥 보내지 말자고, 그동안 해보고

싶던 일을 하자고. 영어라도 확실히 도전해보면 어떨까하고. 노트도 몇 권 샀다. 읽다가 외울 것은 적기로

하고. 전화기로 다운받은 영어성경은 수시로 듣는다. 그나마 어눌하게 구사한 영어도 회사를 나와 매일

쏼라대며 말할 상대도 없다.

그 대신 영화를 열심히 보면 되리라. 내가 좋아하는 영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수없이 봤다.

클린트이스트우드의 영어발음이 좋다. 알아듣기 좋은 중후한 목소리가 매력적이다. 사흘간의 슬픈

사랑을 아름답게 꾸몄다. 좋은 영화이지만 주인공 두 사람의 불륜이 걸린다. 다른 영화를 찾을까보다.

‘노트북’이란 영화도 있다. 같은 날 죽는 두 노부부의 모습이 석양을 배경으로 가슴을 울린다.

언제부턴가 남편이 옆에 있어도 설레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빠짐없이 하던 입맞춤이 뜸해져도

서운하지 않다. 어쩌다 저녁을 먹으러 가도 재미없다며 우리 사이에 누군가를 끼어 넣는 남편이 그리

밉지 않다.

목욕탕 싱크위에 어디서 왔는지 개미 몇 마리가 아주 느린 걸음으로 다닌다. 비쩍 마른 몸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지 모른다. 그 모습이 내 걸음걸이 같다.

자궁암검사를 했다. 결과는 그곳이 너무 메말라서 살점이 끄집어 내지지 않아 Lab에선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째 검사도 마찬가지다. 젊은 의사라서 경험부족일까 의심을 했지만 내 나이가

그렇다고 했다. 걱정을 접고 내년으로 검진을 미뤘다.

얼굴에 기름기가 많아 여드름이 돋고 휴지로 닦아내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아무리 화장품을 발라도

건조하다. 그러나 남편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만은 언제까지나 촉촉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