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건너 오두막-담배여자
2013.10.28상세 본문
담배여자/이용우
매캐한 담배냄새가 후각을 비집고 들어오는 지점은 언제나 다리 부근이었다. 주차장으로 가기위해서는
개울위에 걸쳐진 3메타정도 길이의 목재다리를 건너야하는데 지독한 담배연기가 그곳까지 날아오는 것
이다.
그런데 담배냄새와 함께 다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남자와 여자의 흥분한 목소리가 서로의 주
장을 마구 잘라먹고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항상 조용하고 고즈넉한 동네였다. 다투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를 기우릴 필요도 없이 F와 S로 시작하는 비속어들이 귀청을 때렸다.
탁하고 걸걸한 여성 음의 주인공은 담배여자가 분명한데, 카랑카랑한 남자 목소리는 짐작할 수 없었다.
음성만으로는 남녀가 뒤바뀐 꼴이었다. 궁금증에 걸음을 재게 놀리며 목을 길게 빼었다.
콘도미니엄 단지로 진입하는 드라이브웨이에 육중한 포드트럭이 길을 가로막은 체 세워져 있었다. 활
짝 열어젖힌 운전석 쪽 문틀에 한 발을 올려놓은 남자가 나를 등지고 선 담배여자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붉은 곱슬머리에 포드트럭 만큼이나 체격이 장대한 중년의 백인 사내였다. 나로
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왜 자꾸 나타나서 나를 괴롭혀, 그래, 어쩔거야? 해봐, 맘대로 해봐!"
담배여자는 볼륨을 높인 녹음기처럼 그 말을 되풀이하며 담배 낀 손을 사내 앞으로 내저었다. 붉은머리
사내는 'F…. you, S…….! I'll Kill You!' 하고 소프라노 톤으로 폭언을 퍼부으며 입에 침을 튀겼다.
싸움구경이 재미있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보거나, 아니면 당사자들 몰래 숨어서 보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싸움꾼 보다 구경꾼이 적은 경우, 재미는커녕 되려 난처하기 십상이다. 둘러보니 두 사람
싸움에 구경꾼은 달랑 나 혼자였다.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하고 걸음을 주춤거리는데 담배여자가 몸을
홱 돌렸다. 그녀는 방금전까지 사내를 향해 내두르던 담배 낀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스, 나 증인 있어! 당신 알아? 지금 당신 입이 뭐라고 말했는지!"
담배여자는 마치 취조관처럼 나와 붉은머리 사내를 번갈아 보며 목청을 높였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
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어서 가만히 서 있었다. 붉은머리 사내는 담배여자를 잠시 노려보더니 아스팔트
바닥에 침을 칵, 뱉고는 포드트럭을 거칠게 몰아 사라져갔다.
"영, 아임 쏘리, 윌리 쏘오리."
붉은머리 사내가 사라지자 담배여자는 진정 미안한 표정으로 나에게 사과했다. 이혼한 전남편인데 가
끔씩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힌다고 묻지 않은 말을 변명처럼 했다.
담배여자는 일곱 살짜리 딸 하나를 데리고 X-RAY 오피스에서 테크니션으로 일하는 싱글 맘이다. 성격
이 소탈하고 이웃들에 관심이 많아서 우리 콘도미니엄 단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아침
저녁으로 단지 입구의 드라이브웨이 근방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오고 가는 사람들과 안부를 묻고 인사
를 나누는 것이 그녀의 중요한 일과이다. '알린' 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애연가인 그녀를 우리 식구들은
'담배여자'로 부른다. 그녀와 통성명을 하기 이전부터 그렇게 불러서 닉네임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보, 담배여자 네도 쿠키 한 통 선물하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두고 쿠키 선물할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고 있는 아내에게 그렇게 제안했더니 좋
은 생각이라며 선선이 승낙했다. 주차장을 오가며 담배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불평을 하던 아내
에게도 싱글 맘에 대한 측은지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침부터 온 집안에 고소한 쿠키 냄새가 피어올랐다. 호두와 건포도, 그리고 아몬드를
듬뿍 넣어 만드는 아내의 홈메이드 쿠키는 맛있기로 정평이 나 있다. 우리 집과 벽 하나 사이로 이웃하
고 있는 조지영감네는 쿠키 바구니를 들고 가면 두 내외가 손뼉을 치며 아이처럼 좋아 한다.
담배여자 네는 일곱 살 딸아이를 생각해서 쿠키박스 위에 초콜렛바 하나를 더 얹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의 초저녁 어둠이 스멀스멀 깔리는 시간에 담배여자네 집을 찾아가다가 중간 지점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친구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걷고 있었다.
"하이, 알린. 해피 할러데이!"
담배여자가 무슨 종교를 갖고 있는지 몰라서 아내가 그렇게 인사를 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메리크리
스마스! 하고 명랑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메리크리스마스!"
우리도 반가운 나머지 힘차게 메리크리스마스를 합창하며 쿠키박스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녀는 쿠키박
스를 받을 손이 없었다. 한 손에는 포도주가 가득 담긴 와인 잔이, 다른 손에는 불붙은 담배가 들려 있었
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여자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매다가, 담배를 얼른 입에 물더니 오우, 땡큐, 하며 쿠키
박스를 한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쿠키박스 위에 놓인 초콜렛바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곁에 섰던 여자가 자기도 담배여자처럼 잽싸게 손에 쥔 담배를 입에 물더니 미끄러지는 초콜렛바를 답
삭 잡아들었다.
"푸하하하!"
우리 모두는 누구랄 것 없이 유쾌한 웃음을 한꺼번에 쏟아 내었다. 한 쪽은 자신들의 미안한 마음을 감
추기 위해서, 다른 한 쪽은 그 것을 감춰주기 위해 더욱 크게 웃었다. 매케한 담배연기가 후각을 파고들
었지만 그것을 탓할 상황이 아니었다.
2011년 1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