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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라쿤의 방

201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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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쿤의 방/ 홍순복

 

 한가한 토요일 오후였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옆집 벽 쪽에서 사각사각 하는 소음이 간헐적으로 들려

왔다. 아마 잭네 집에서 무슨 공사라도 하는가 싶었다. 헌데 그 소리는 공사하는 소음이라기보다는 무슨

설치류 따위가 벽을 타고 오르거나 바닥을 긁는 소리 같았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소리 나는 곳을

추적해보니 벽이 아니라 화장실 천정 쪽 인 듯 싶었다. 메스터 베드룸으로 통하는 화장실 문설주 위쪽

손을 뻗혀도 닿을 수 없는 위치에 가로 세로 1미터정도의 정사각형 문짝이 달려있다. 그것이 다락방으로

통하는 문이고 손잡이도 없는 그것은 밖으로 쳐진 대못을 구부려 열림을 막고 있었다.

 지난해 이집을 보러왔을때 60대의 중동계인 주인여자는 화장실 천정위의 다락방을 가리키며 오래 보관

할 것이 있으면 그곳을 이용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긴 사다리를 구해야 하고 높은 곳에 힘겹게 올릴

일이 뭐 있나 싶어 관심 밖에 두었다. 그러나 소리가 날 때마다 무서우면서도 심한 궁금증이 일어 그 닫

힌 문짝을 활짝 열고 싶었다. 허지만 무언가 튀어 나올 것 만 같은 상상에 담력이 큰 둘째 형부에게 언제

한번 방문해 달라고 부탁을 해두었다.

 처음에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딸아이였다. 아마 고스트가 사는가봐, 하며 무서워했다. 우린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하자 아이는 믿지 않는 우리가 답답하다고 했다. 밖에 외출이라도 해서 늦어지면 딸은

빨리 오라고 전화를 했다.

 어느 날 깊은 잠이 들었는데 천정에서 괴성과 함께 싸우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전쟁이

난 듯 했다. 남편은 소리가 들 고양이 같다고 우겼다. 그러나 나는 무슨 고양이가 지붕에서 사느냐며 큰

쥐일 거라고 했다. 남편은 긴대자로 문짝을 두드렸다. 그러면 잠시 조용하다가 다시 시끄러운 소음이 들

리곤 했다.

 다음날 잭의 아내를 집 앞에서 마주쳤다. 나는 너희 집에 무슨 공사라도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정색을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래도 쥐나 라쿤같은 것이 사는 것 같다며 그녀도 지난밤 괴성을

들었다고 했다. 아마도 다락방이 자기네와 서로 통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 남편 잭과 또 다른

옆집 조지을 불렀다. 이 콘도미니엄 단지에서 터주대감 노릇을 하는 조지영감은 동네 모든 집들의 구조

나 사정들을 통반장처럼 훤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조지영감은 몇 년 전 혼자 사는 어느 여자네 집에서

도 라쿤이 벽장문을 밀고 튀어나와 혼이 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만약 라쿤이면 어쩌나,

가끔씩 쓰레기장의 벽돌담위에 올라앉은 라쿤을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그 녀석이 아닌지 모르겠다.

 형부가 사다리를 들고 왔다. 사다리를 타고 오른 형부가 조심스럽게 못을 제거하고 문을 막대기로 툭툭

쳐서 다락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아무소리도 없었다. 또 한 번 두드렸다. 아침에는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었는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형부는 조금씩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 형부가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상체를 뒤로 젖쳤다.

"형부, 뭐가 있어요?"

 나는 깜짝 놀라 큰소리로 물었다.

 " 라쿤 큰놈이 나를 쳐다보고 있어!"

 형부가 문을 활짝 열었다. 나도 밑에서 목을 길게 빼고 올려다보니 하얀 줄이 있는 커다란 라쿤 한마리

가 으르렁 거리며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은 밖으로 통하는 구멍에 몸통을 내밀고 머리만 안쪽

으로 향한 채 크으응, 하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이쪽을 노려 보 고 있었다. 허지만 녀석도 겁이 나는지

크르릉 거리면서도 가까이 접근하지는 안했다.

 손전등으로 다락방속을 비추던 형부가 또 한 번 어이쿠, 하더니 구석바닥에 라쿤새끼가 있다고 했다.

아이주먹만한 새끼 세 마리가 꼬물거리고 있다며 그래서 저놈이 달아나지 않고 있는 거라고 했다. 정말

어미 라쿤은 자기새끼를 두고 갈 수 없어서 그런지 지붕 밑 구멍에 머리를 들여 민 채 아무리 작대기로

위협을 해도 크릉거리며 물러서질 않았다. 형부는 잠시 문을 닫고 기다려보자고 했다.

 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열어봤다. 한 마리가 없어졌다. 어미가 어디로 물고 간 듯 했다. 갑자기 밖은 비

가 내리고 있었다. 남편은 비도 오는 데 갑작스레 내몰아서 마음이 좀 그렇다고 했다. 비나 그치고 할 걸

그랬다고 걱정을 했다. 나는 당신 동물사랑이 너무 과하시네, 딸은 무서워 죽겠다는데, 하고 픽 웃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라쿤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어미 라쿤이 새끼 한 마리를 물어간 것으로 보아 나머

지도 가져갈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서너 시간이 지난 후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봤다. 라쿤 어미

는 물론 새끼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형부는 동물이 싫어하는 소음기계를 홈디퍼에서 사다가 장치했다. 그것을 설치하면 사람 귀에는 들리

지 않지만 동물들은 물론 벌레까지도 도망을 친다고 했다.

 형부가 돌아가고 나자 집이 괴괴할 정도로 조용하단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다락방문을 올려다보며 참

안됐다, 비도 오는데 새끼들 데리고 어디로 피난을 갔을까, 하고 또 걱정을 했다. 그린이 킥킥거리며 아

빠 참 웃긴다고 남편의 어깨를 툭 쳤다.

 서너 주가 지난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려서 문을 열었더니 옆집 잭의 아내가 빨리 나와 보라고 했다. 우리

세 식구는 무슨 일인가 하고 모두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조지영감

네 집 나무위에 라쿤 한 마리가 걸터앉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큰 몸통에 흰줄이

쳐진 우리 다락방에 살던 그녀석이였다. 새끼들은 어디다 두고 저렇게 혼자 망중한을 즐기는 것일까 하

고 생각하는데 녀석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라쿤 어미가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아 무서워서 얼른 집

안으로 들어오는데, 새끼들은 어디 두었니? 방은 구했니? 하는 남편의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