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메뉴바로가기
     

개울건너 오두막-지구시간

2013.11.14

상세 본문

지구시간/ 이용우

 

 지난 3월의 마지막 주말에 전 세계적으로 지구 살리기 운동이 펼쳐졌다. 모든 지구촌 사람들이 같은 날

자 같은 시각에 한 시간 동안 에너지 사용을 중단하는 지구 살리기 이벤트였다. 후손에게 물려줄 지구

시간을 우리세대의 노력으로 조금이나마 늘려보자는 지구인들의 간절함이 배어있는 행사라고 하겠다.

지금 일본에 닥친 천재지변도 지진이나 쓰나미 보다 원전문제로 인한 인재가 더욱 무서운 재앙이 되어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인류가 살아가기 위해 과학의 힘을 빌어야 하는 것이 불가분의 일이기

는 하지만, 원전처럼 극히 위험한 방식의 에너지 추출법은 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할 일이다. 어느 날 환태

평양의 지진대가 현 동일본 지진의 몇 배 크기로 한꺼번에 요동친다는 가정을 해 본다면, 그 상상만으로

도 충분히 종말의 현장에 나앉은 느낌일 것이다.

 나는 우리 가정도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지구 건강을 지키는 이 세계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

다고 생각되어 하루 전날 저녁 식사자리에서 식구들에게 말했다.

 “내일 밤 여덟시 삼십분부터 아홉시 반까지 한 시간 동안 에너지 사용을 하지 않는다. 전 세계가 같은 시

간에 실시하는 지구 살리기 운동이니까 미리미리 준비해서 그 시간에는 전기나 가스 사용을 하지 말아

요. 물론 자동차도 탈수 없어, 알았지요?”

 아내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린이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말해주어서 알고 있다며 오케이, 하더니 그런데

그 한 시간 동안은 뭐하지? 라고 물었다. 나는 미처 생각지 못한 그린의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얼른 이

렇게 대답했다.

 “응, 그 한 시간 동안 뭐하냐하면 말이야, 촛불 켜놓고 책을 읽던지 아니면 우리 모두 한 방에 모여 얘기

나 하자, 내가 재미있는 옛날얘기 해줄게.”

 “촛불? 와우, 재미있겠는데.”

 촛불이라는 말에 그린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지구 살리기 운동을 마치 대통령 담화문처럼 엄숙히 발표한 내가 정작 그 날이 되어서는 그만 깜

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른 저녁을 끝내고 다음날 쓸 현금을 조금 찾자는 핑계로 아내와 함께 집을 나

섰다. 은행을 돌아오며 나온 길에 잠시 쉬었다가자고 커피샵에 들른 것이 그만 주말이라는 느슨함에 끌

려 시간을 잡아먹고 말았다. 태평한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그린이가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

며 얼굴을 찌그렸다.

“아빠, 지금 여덟시 이십분이야. 얼스타임 십분 밖에 안 남았어.”

그린의 말을 듣고서야 아차, 하며 그제야 지구 살리기 운동이 생각났다. 나는 아이고, 맞아! 하며 얼른 샤

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동안을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 필경 졸음이 몰려올 터이니 지금

이라도 대충 씻어두는 편이 나을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린아, 아빠가 오 분 내로 샤워 끝낼 테니까 너는 얼른 양초하고 성냥 좀 찾아봐.”

벼락치기로 샤워를 하고 나와서 빈 병과 작은 컵 따위를 가져다 촛대를 대신하여 우리 방과 그린이 방에

두 개, 그리고 화장실에 한 개씩 불을 밝혔다.

“아빠, 나 무서워, 아빠 방에 같이 있을래.”

 그린이 숙제할 노트며 필기도구를 한 아름 들고 우리 방으로 건너왔다. 나는 할 수없이 내 컴퓨터 책상

을 내주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잠시 후 부엌을 대충 정리한 아내가 아래층을 모두 소등하고 올라오더니

샤워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시간은 8시 30분을 4~5분이나 넘어서 있었다.

“여보, 샤워하려면 가스를 사용해야 되잖아. 가스는 에너지가 아닌가?”

“그럼 어떻게 해, 침대에 누워있다 보면 잠이 들 텐데. 규정을 조금 어기더라도 몸은 씻어야지. 대신 내가

전기불은 끄고 촛불 켜놓고 샤워할게. 여보, 촛불아래 목욕하는 여인, 얼마나 낭만적이야. 나 샤워해도

되지?”

“낭만이라니, 지금 지구가 죽어가고 있는데 태평하게 낭만타령이나 하고 있을 때야? 그린아 어떻게 해야

되지? 엄마 샤워하는 거.”

 나는 웃음이 났지만 그린이가 있기 때문에 배에 힘을 주고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린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명쾌한 답변을 내었다.

“오케이, 엄마 샤워해. 그 대신 엄마 샤워하는 시간은 얼스타임에서 빼야 돼.”

그러니까 엄마 샤워하는 만큼 절전 시간을 연장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전 세계가 같은 시간에 시작해서

함께 마쳐야할 지구 살리기 운동에 우리 집만 특별히 십여 분쯤 늦어지게 되었다. 어쨌든 아내는 낭만적

인 샤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린이가 촛불 하나로는 어둡다며 우리 방에 켜놓은 두 개의 양초를 모두 컴퓨터 책상위로 가져가버려

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신문을 들고 그린이 방으로 건너갔다. 양초를 두 개나 켜놓았다지만 전등불에 비

해 촛불은 비할 수없이 어두웠다. 방문 입구의 장롱 위와 저만치 침대 곁의 책상에 촛불을 놓아두었지

만, 아이가 아무렇게나 던져둔 책가방에 발이 걸릴 만큼 바닥이 보이질 않았다.

 가져간 신문을 읽으려면 아무래도 그린이처럼 양초를 한 곳으로 모아야할 것 같아서 책상위의 것을 가

지러 조심조심 발을 옮기는데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머리끝이 쭈뼛 당겼다. 얼른 양초를 집

어 들어 책상아래를 비추었다.

 “오, 구찌로구나! 세상에, 이놈의 정신머리라니. 그래, 네 집이 바로 이곳이었지.”

그린의 방에 있는 두 개의 책상 중 침대 곁에 있는 책상 밑이 강아지 구찌의 침실인 것이다. 평소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빛의 질감이 달라지자 사고의 영역에도 변화가 생긴 모양인지, 딸의 방이 전혀

낯선 공간으로 비춰진 것이었다. 그만큼 빛은, 그 빛을 만들어 내는 에너지는, 그리고 그 에너지를 품은

지구는 우리 인간에게 너무도 소중한 것이다.

 아무려나 우리의 강아지 구찌야 말로 전 세계가 벌리는 지구 살리기 운동에 가족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04-10-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