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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선글라스

20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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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글라스/ 홍순복

 

 지난여름 선글라스 두 개를 샀다. 비싸지 않고 모양이 괜찮아 딸과 내 것으로 안경다리색만 다른 것으

로 골랐다. 딸아이는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도보로 집에서 1마일 남짓한 학교를 등하교한다. 켈리포니

아의 강한 햇볕아래 눈을 노출시키게 됨으로 선글라스는 필수가 아닐 수 없다. 얼마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사준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 가방 속에 그저 넣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은 즉 자기는 얼굴에

뭔가 쓰는 것이 무겁고 귀찮다고 했다.

 지난주에 딸과 함께 백화점에 가게 됐다. 그런데 뒷자리에 올라타는 딸아이가 놀랍게도 차안에서 선글

라스를 끼고 있었다.

 " 그래, 그렇게 꼭 써야해. 멋있다. 캘리포니아는 햇빛이 강해 눈에 좋지 않아. 그리고 스크린을 너무 보

면 눈이 나빠진다고 닥터가 말했잖아 조심해야해."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지만 의외로 아이는 아무 대꾸 없이 실실 웃기만 했다. 웬일로 저렇게 순순히

'또 잔소리'라고 말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컴퓨터를 많이 하는 딸은 낮에 하늘을 바라보면 서클이 보인다고 했다. 겁이 나서 안과에 데려갔었다.

다른 친구들도 그렇다고 했다. 안과의사는 안구의 젤이 떨어져 그런 현상이 온다며 같은 증상이 계속되

면 다시 오라했다.

 딸은 저녁에 피트니스에 가면서도 선글라스를 썼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세히 봤다. 내가 사준

선글라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얼굴에 딱 붙는 스타일로 더 검고 안경다리가 가늘었다.

 " 그거 어디서 났니?"

 " 엄마전의 엄마거야?"

 나는 아이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서 재차 물었다. 엄마전의 엄마 것이 뭐냐 그건 다리가 부러져 새것

으로 사지 않았냐고 해도 딸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계속해서 엄마전의 엄마 것이라며 조금은 미안해하

는 표정으로  겸연쩍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제 생모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았다.

 " 경희엄마거니?"

 "응,….."

 "그럼 내가 사준 건 싫고 그 엄마 것이 좋단 말이야?"

아이는 이번에도 응, 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지난번 새 선글라스를 사지 말라고 하지 쓸데없이 낭비했

다고 핀잔을 주자 아이는 두 손을 크게 내저으며 아니야, 그게 아니야 라며 소리를 쳤다.

 " 우연히 엄마 상자 속에서 찾았어. 나도 몰랐어. 그리고 이것이 얼굴에 착 달라붙어 더 좋아. 엄마가 그

렇게 말하면 슬퍼, 그게 아니야. 그런데 brand가 뭔지 지워져서 모르겠어. 엄마가 볼래?"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안경을 벗어 내 손에 건네준다. 그것은 Giorgio Armani 였다. 언제 산건지 모르

겠지만 제법 가격이 나가는 제품 같았다. 아이는 자꾸 한 번 써보라고 했다. 저야 제 엄마 것이니까 괜찮

겠지만 나에게는 거북스런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얼굴 한 번 본적 없이 고인이 된 사람의 유품이라 더

욱 꺼림칙했다. 망자의 것을 몸에 지니기를 꺼리는 우리네 풍습 때문일까 나 역시 그런 면에선 까탈스러

웠다.

몇 년 전 큰언니가 주님 품으로 떠나자 조카가 우송비를 적잖게 들여서 옷 한 박스를 보내왔다. 한국과

이곳 그리고 세대차이가 나고 취향이 달라 건질 만한 것이 없어 오랫동안 옷장 속에 넣어 두었었다. 가

끔씩 언니가 생각날 때면 옷장에서 죽은 언니가 튀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얼마 후 언니의

옷들을 모두 도네이션 해버렸다.

 사내아이처럼 짓궂은 데가 있는 딸아이는 싫어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억지로 내 얼굴에 그 안

경을 씌웠다. 무거웠다. 어느 사진속의 딸아이 생모의 선글라스 낀 얼굴이 생각났다. 기분이 조금 이상

해졌다.

"좋네, 엄마 것 보다 편하지 이게?"

 딸아이는 그래서 자신이 쓰는 거라고 또 한 번 강조했다. 허기는 그 선글라스뿐이 아니다. 수박이 조각

된 페이퍼타월 걸이도, 십여 개의 각종 로고가 새겨진 머그컵들도 다 아이 생모가 생전에 수집해 놓은

것들이다. 부엌 캐비닛 속에 놓여있는 내 것 이외의 몇 가지 용기들도 아이 생모가 만지고 쓰던 물건들

이 더러 있다.

어느 날 오래된 와플기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남편이 넌지시 말했다.

" 그거 당신 선배가 아끼던 물건이야. 당신이 잘 쓰니까 좋아 보이네."

 그는 엷은 미소로 내 반응을 엿보는 듯 했다. 남편은 아이의 생모를 말 할 때면 '당신 선배'라는 호칭을

붙여 나와 같은 여고출신임을 은근히 강조한다. 나는 남편의 말이 싫지만은 않았다. 필연 아닌 우연이

없듯이 딸아이와 함께 선배가 남긴 물건들이 그녀가 내게 준 또 다른 선물일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

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나도 이 땅을 떠날 때는 무엇이든 내 흔적이 남겨질 것이다. 그러면 나와 인연이

된 누군가가 그것들을 쓸고 닦으며 사용하리라.

 

딸아이는 선글라스를 가지고 가라 해도 한사코 차에 두고 함께 쓰자고 했다. 딸이 놓고 내린 선글라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테가 가늘고 날렵한 그것은 마치 써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나는 크리넥스 한

장을 뽑아 입으로 후후 불어 렌즈의 얼룩을 닦아내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으로 가져갔다.

" 선배, 어때요, 어울려요? "

햇빛가리개에 붙은 거울에 얼굴을 바짝 들여 밀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물었다. 오늘 따라

출근길 프리웨이가 훤하게 밝아 보였다.

 

 

03-06-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