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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바늘도둑

201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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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도둑 / 이용우

 

 그린은 보고, 먹고, 즐기려면 얼바인 스펙트럼으로 가고, 옷이나 신발 따위 샤핑을 할 때는 미숀비에호

몰로 간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스펙트럼은 재미가 있고, 미숀비에호는 예쁜 옷가게가 많아서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펙트럼에 갈 때와 미숀비에호에 갈 때의 친구가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대게 그

런 곳에 그린을 데려다주는 일은 아내가 하는데 어쩌다 시간이 얽히면 내가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나는

양쪽 몰에 두어 번쯤 갔었다.

 스펙트럼에서는 두 번 모두 주차장 건물 뒤의 영화관 들어가는 입구에서 내려주었는데, 대여섯 명의 친

구들은 백인과 중동 계들이었다. 물론 그린의 학교 친구들이다. 나처럼 딸을 데려다주러 온 어느 아빠와

하이, 하고 인스턴트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부모의 심정이 다 그렇듯이 자기 자식의 친구가 어떤 아이

들인가 하는 눈빛으로 서로들 힐끗거린다. 만나기로 한 친구들이 다 모이면 아이들은 바이, 하며 몰 안

으로 들어가고, 어른들은 몇 시간 후의 픽업을 약속하며 헤어진다.

 그런데 스펙트럼과는 달리 미숀비에호 몰에 갈 때는 그린의 친구가 달랑 하나 뿐이다. 그 친구는 필리

핀 계의 ‘엘리스’ 라는 예쁜 이름을 가졌는데 스펙트럼에서 만나는 친구들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아이

다. 그 나이또래의 아이들은 대게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 보통인데, 엘리스는 항상 원피스 아니면 하늘

거리는 블라우스에 꽃무늬 짧은치마를 입는다. 한마디로 말해 숙녀티를 물씬 풍기는 아이이다. 홀어머

니와 단 둘이 산다는데 자동차가 없어서 언제나 우리가 엘리스의 집으로 데리러가고 샤핑이 끝나면 다

시 데려다준다.

 지난 토요일은 아내가 그린과 엘리스를 미숀비에호 몰에 데려다주었는데, 샤핑이 끝나는 오후시간에

아내에게 볼일이 생겨서 아이들 픽업을 내가 하게 되었다.

“하이, 미스터 리. 하우아 유? 롱타임 노씨!”

 샤핑백을 두 손에 들고 차에 오른 엘리스는 어른인 내가 쑥스러울 정도로 능란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

고는 자기 집이 이사를 했다며 컬버와 포톨라가 만나는 부근으로 가자고 했다. 엘리스도 그린과 마찬가

지로 놀스우드 하이를 가는데 아마도 걸어 다니기 좋게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엘리스의 지시대로 그곳에 다다라 굉장히 큰 아파트단지를 꼬불꼬불 돌아 집 앞에 내려주고 빠

이, 하며 헤어졌다. 대여섯 번도 넘게 꺾어 들어갔던 길을 어렵사리 되짚어 나오는데 그때까지 입을 닫

고 있던 그린이가 뚜벅 말했다.

“아빠, 엘리스가 액세서리가게에서 썸띵을 훔쳤어.”

나는 훔쳤다는 말에 깜짝 놀라 응? 하며 그린을 돌아봤다.

“엘리스가 훔쳤어? 뭐를.”

“헤어밴드 두 개.”

“헤어밴드? 엘리스가 훔치는 거 네가 봤어?”

“아니, 엘리스가 그 가게에서 나와서 말했어, 헤어밴드 훔쳤다고.”

“그래서 넌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했어… 엘리스가 엄마 첵크를 줄 테니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내가 첵크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 싫다고 했어. 그래서 엘리스가 돈이 없어서 훔쳤나봐.”

“뭐, 돈이 없어서 훔쳐? 기가 막혀서… 그리고 정말 엘리스가 엄마 첵크를 가지고 왔어? 니가 봤어? 첵크

를 봤어?”

 나의 다그침에 그린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스가 가지고 온 돈을 옷 사는데 모두 써버

리고 액세서리 가게에 들러 또 사고 싶은 것이 눈에 띄니까 자기 엄마 첵크를 바꾸려고 했다는 말이다.

나는 가슴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햐, 요것들 봐라! 하는 생각으로 숨이 차올랐다. 엘리스

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진즉에 눈치 챘지만 자기 엄마의 첵크까지 들고 다닐 줄은 몰랐다. 어쩌

면 제 엄마가 스스로 첵크를 준 것은 아닐까, 잠시 그렇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개연성은

없어보였다. 미성년자 아이가 들고 다니는 첵크를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것은 절대로 좋

은 그림은 아닌 것이다.

“이제부터 엘리스가 샤핑 가자고하면 무슨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좋게 거절해, 엄마 아빠에게 물어보겠

다는 핑계를 대기도 하고. 그리고 엘리스가 헤어밴드 훔친 것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알았지?”

내 말에 그린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아빠도 말하지 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