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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착한손녀

201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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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손녀(1) / 이용우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린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할아버지가 지금도 전화를 안 받아.”

시계를 올려다보니 12 시가 넘어있었다. 지금쯤은 연락이 되어야 저녁식사라도 같이 할 수 있을 터인데

아직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엘에이에 나와 있는 그린이 헛걸음을 하게 생겼다.

“그래? 이상하네, 전화기 충전하는 걸 잊어버리셨나… 알았어, 아빠가 한번 해 볼게.”

내 그렇게 대답하자 그린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빠, 할아버지 죽었으면 어떻게 해…”

헛웃음이 났다. 아이는 한국말을 곧잘 하다가도 가끔 저렇게 방정맞은 소리를 해서 가슴을 벌렁거리게

한다.

“이놈아, 할아버지가 얼마나 건강하신데 그런 말을 하니?”

“아빠가 그랬잖아, 올드피플은 밤에 자다가 안 일어나면…”

“허, 참내. 전화 끊어, 내가 해볼게. 너는 아빠가 전화할 때까지 친구하고 잘 놀고나 있어.”

그린이 지난달 외할아버지와 만나고 돌아오는 차속에서 ‘아빠, 할아버지는 백 살도 더 살겠지?’ 하고 물

었다. 나는 ‘그럼, 할아버지가 얼마나 건강하신데. 십년은 너끈히 더 사시지.’ 라고 했는데 그 말끝에 ‘그

런데 노인네들은 아무리 건강해도 잘 모른단다, 저녁에 굿나잇 하고 주무셨는데 아침에 안 일어나면 돌

아가신 거야’ 라고 했다. 그린이는 아마도 할아버지가 여러 번 전화를 해도 안 받자 -아침에 일어나지 못

한 것- 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린이 외할아버지(생모의 부)는 올해 세수가 아흔 하나이시다. 6 피트 정도의 키에 여직 허리도 꼿꼿하

시고 지병도 없이 엘에이 웨스턴과 와싱톤불러버드 부근의 노인아파트에서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계신

다. 외동딸과 조강지처를 앞서 보낸 아픔 외에는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양반이다. 작년에는 얼굴의

검버섯 없애는 시술도 받아서 안색도 밝고 훤하시다. 이틀에 한 번씩 아파트 청소와 빨래 등을 도와주는

파출부 도우미와 아들(그린 생모의 남동생) 내외의 보살핌으로 부족함 없이 사신다. 주중에는 보건센타

에서 게임도 즐기고 친구들 만나는 일로 소일하시다가 일요일이면 교회 나들이로 한 주일을 마감하시는

이 분에게 있어 가장 즐거운 일은 한 달에 한번 외손녀딸 그린을 만나는 일이다.

그린이와 전화를 끊고 이번에는 내가 할아버지의 휴대폰으로 신호를 보내 보았지만 받지를 않았다. 30

분 간격을 두고 한 번 더 했지만 역시 응답이 없었다. 잠시 일에 묻혀 정신을 팔고 있는 어느 순간 전화벨

이 울렸다.

“아범이냐? 나다. 이, 전화통이 고장이 났어야, 어제부텀 벨소리가 안 들려, 기래 전화를 못 받았서야. 그

린이 엘에이 나왔냐?”

“네, 저녁에 별 계획 없으시면 식사나 같이하시지요?”

“기래, 낸 아무 약속 읎으니끼니 집 앞에 와서 전화하라야.”

그린이에게 전화를 걸어 할아버지와 통화를 했다고 하자 제 딴에는 꽤나 걱정을 하고 있었든지 정말? 왜

그랬데? 하며 반색을 했다.

토요일 근무를 오후 3시에 마치고, 아침 출근길에 라브레아에 있는 아이의 친구 집에 데려다 놓았던 그

린을 픽업하여 노인아파트로 갔다. 그린이 전화를 하자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

었다. 그린이 얼른 층계 밑으로 뛰어가 내려오는 할아버지의 손을 부축했다. 손녀딸을 만난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늘 그렇듯이 봉투 속에는 돈

100불이 들어 있을 것이다. 한 달에 한번 만날 때면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용돈을 주시는데, 그 일이 노인

네가 느끼는 기쁨 중 가장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받는 월페어에서 매달 백 불을 떼어 놓았다가

외손녀딸에게 쥐어주는 즐거움이 활짝 웃는 얼굴에 숨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로데오갤러리아 몰의 한국식당으로 가서 냉면을 먹었다. 신의주가 고향인 그린의 외할아버지는

냉면을 좋아하셨다.

“그린아, 할아비가 준 돈 오십 불은 니 용돈허구, 오십 불은 저금하라. 기러카구 대학가거들랑 변호사 공

부는 하지 말라, 알았네?”

할아버지를 만나면 어김없이 듣는 그 말에 그린은 히히,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한다. 변호사는 살인자, 도

둑놈 가리지 않고 죄를 덮어주고 돈이나 버는 나쁜 직업이니 절대로 하지 말고 아픈 사람 고쳐주는 닥터

가 되라고 했다. 할아버지에게서 수도 없이 그 말을 들어온 그린은 의사가 되겠다는 대답을 하지는 않았

지만, 변호사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자, 다 먹었으면 할아비 집으로 가자.”

항상 같은 코스이다. 헤어지기 전에 노인아파트에 함께 올라가서 이것저것 할아버지가 챙겨주는 먹거리

를 싸들고 나오는 것이 그린의 마지막 과제이다. 그런데 이때가 가장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다.

그동안 당신이 먹지 않고 쟁여두었던 과일이나 소다, 또는 빵, 과자, 사탕 따위들을 봉지봉지 싸주시는

데, 그것들이 너무 오래 묵혔던 것이라 신선도가 형편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당신은 구십 노인네라

잘 안보이시겠지만, 귀퉁이가 썩은 과일, 퀴퀴한 냄새가 풀풀 나는 빵 덩어리를 비닐봉지에 꽉꽉 눌러

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한번은 집에 와서 봉지를 풀어보니, 참치통조림의 유효

기간이 5년이나 지난 것이어서 세 식구가 서로 쳐다보며 입을 딱 벌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보아 넘기는 아이가 바로 그린이 이다. 제

할아버지가 냉장고속에서 또는 탁자 밑에서 잡다한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을 도와주며, 또는 가만히 바

라보며 그 일이 끝나기를 묵묵히 기다린다. 썩은 것을 싸든, 터진 것을 집어넣든 보고만 있다.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치면 혀를 쑥 내밀어 코믹한 표정을 지으며, 할 수 없지 않으냐는 얼굴을 하며 광대처럼 웃었

다.

“그린아, 이거 한번 먹어보라. 아주 맛있는 기야.”

마켓봉투 두 개를 빵빵하게 채운 노인네가 흡족한 얼굴로 그린에게 말했다. 뭔가 하고 돌아보니 반원형

의 갈색 쿠키였다.

“이 과자가 영양이 아주 많아, 소다에다 찍어먹으면 먹기두 수월하디. 한번 먹어보간?”

그린이 히히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하자 영감님은 정체불명의 푸르스름한 소다에 한참이나 쿠키를 담갔

다가 꺼내어 그린에게 주었다. 그린은 쿠키를 받아 한입 베어 물고 몇 번 우물거리더니 좋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녀딸의 먹는 모습이 좋은지 영감님은 입을 허, 벌리고 웃었다.

할아버지가 싸준 마켓봉지를 그린과 함께 나눠들고, 늘 그렇듯이 우리는 방문 앞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반쯤은 버리고, 사분지 일쯤은 냉장고에 넣고, 그 나머지는 판단을 유보할

것이 뻔한 짐 보따리를 들고 그린과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아빠, 이거 먹어.”

그린이 불쑥 내민 것은 푸르스름한 소다에 담갔던 쿠키였다.

“나는 싫어, 너나 다 먹어.”

그러자 그린이 우윀, 헛구역질을 하며 말했다.

“나 한번만 더 먹었으면 진짜 토했을 거야.”

“그런데 왜 먹었어?”

“할아버지가 좋아하니까.”

“어이구, 효녀 났네. 그래, 잘했다 잘했어.”

나는 발돋움을 하여 키가 2인치나 더 큰 그린을 꼭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