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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직장 상사 베어리

201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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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상사 베어리/ 홍순복

 

  닥터에게 다녀오느라 아침 출근을 조금 늦게 했다. 서랍 속에 핸드백을 막 넣으려

는데 어느새 왔는지 매니저 베어리가 내 앞에 서있었다. 평소와 달리 굿모닝도 거른

채 무슨 난리라도 난듯 구름 낀 얼굴이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차가운 얼굴을 내

게 내밀 때는 어떤 사건이 분명 발생한 것이다.

" 순, 찬에게 전화해."

 그렇게 말하며, 계속 그러면 더 이상 여기서 일 할 수 없을 거라는 경고도 덧붙였

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회사 Lab에서 모운 리사이클 병 한 자루가 어젯

밤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거였다. 그는 보나마나 청소하는 찬의 일꾼이 가져간 거

라고 단정했다. 찬은 한국아저씨다. 몸집이 작고 생김이 동남아 사람 같아 보여 나

도 처음엔 영어로 인사를 했었다. 찬 아저씨는 영어가 서투르지만 그런대로 알아들

을 수 있는데 매니저 베어리는 그 아저씨의 발음이 이상하다며 들으려고 하지도 않

았다.

 그래서 찬 아저씨에게 전화할 일이 있으면 내가 하게 되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왜

냐하면 대게 불평의 말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찬 아저씨는 언제나 자신

을 도와준다며 고마워했다. 내가 찬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에서 모아둔 리사

이클 병이 한 자루 없어졌는데 매니저가 찬아저씨 헬퍼를 의심한다고 하자, 아저씨

는 기가 차다는 듯 어쩌겠어요. 물어줘야죠. 10불이면 충분하겠지요. 했다. 나도 속

이 상했다. 폐품을 잃어버리고 돈으로 받아내는 매니저가 참 어지간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느 날 찬 아저씨는 회사근처에 왔다 들렀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시는

사업은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신통치 않았다.

" 요즘 잘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다들 싸게들 하니까 이 짓도 못해 먹겠어요. 일하는

녀석은 월급 올려 달라 하고요."

 찬 아저씨는 아내가 아파서 맞벌이를 못한다고 했다.

 내가 처음 매니저 베어리의 디파트먼트에 합류했을 때 그는 나의 쉬운 말도 못 알

아듣는다는 표정으로 왓? 왓? 하고 벌레 먹은 표정을 했다. 그의 밑에는 나까지 여

섯 명이 있었지만 전산화가 되면서 인원을 줄여 지금은 나만 남게 되었다. 베어리는

아시안의 영어발음도 흉내 내며 비웃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일침을 놓았다고 했

다. 그렇게 놀려먹다 언젠가 누구를 화나게 해서 고소를 당하게 될 거라고. 이쯤에

서 그만 두라고 했단다. 허긴 우리가 사는 미국엔 Sue crazy가 많다. 베어리는 조금

겁이 났는지 그 후로는 많이 자제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웃기는 것은 베어리야말로 미국직원들도 자세히 들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발음이 이상했다. 혼자 웅얼거리는 소리로 빠르게 말해서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할 말이 있으면 일단 속으로 연습을 한

후 크게 심호흡을 하고 그의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아주 큰소리로 목청을 꾹꾹 눌

러가며 또박또박 말한다. 그러면 베어리는 안경너머로 나를 보며 아주 거만한 표정

으로 짧게 오케이, 하고는 컴퓨터로 눈을 돌린다. 몇 가닥 남지 않은 앞머리를 길러

옆으로 붙인 그의 나이를 알 수 가 없다. 어림짐작 육십 대 중반쯤 된 것 같다. 늘 구

부정한 어깨를 하고 땅만 보며 걷는다. 구두의 굽은 닳고 닳아 한쪽으로 쏠리고  와

이셔츠는 팔꿈치가 너무 낡아 살이 보일 정도로 입었다. 오죽하면 직원들이 그의 생

일과 크리스마스에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여러 장 선물해서 요즘은 입성이 제법 반

반하다.

 베어리 밑의 직원들이 다 떠나고 나 혼자 남게 되자 그는 전보다는 부드럽게 대했

다. 여럿이 함께 나눠 하던 일이라 나 혼자 하기엔 힘겨웠다. 고객들에게 납부고지

서를 발송한 후의 일주일은 굉장히 바쁘다. 많은 물량의 메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

어오기 때문이다. 수표의 고객번호를 찾아 컴퓨터에 입력하는 게 주요한 업무이다.

그때엔 베어리도 같이 일을 돕게 되는데 어쩌다 그의 사무실을 들여다보면 빈 봉투

를 산더미같이 책상위에 쌓아두고 있다. 처음엔 뭐 하러 저렇게 봉투를 쌓아두나 의

아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일 많이 한다는 것을 사장에게 보이기 위해 그런다는 생

각이 들었다.

 가끔 누가 회사건물의 청소에 대해 조그만 불평을 해도 베어리는 내게 쪼르르 달려

와 찬아저씨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다. 어느 날  에어컨 기술자가 천정에 올라가 작

업을 하고 부스러기를 떨어트렸는데 베어리가 그것을 가리키며 이게 뭐냐고 했다.

그 작은 일 때문에 또 찬아저씨를 부르기에는 너무 한 것 같았다. 그래도 매니저가

성화를 하니 어쩔 수 없이 아저씨에게 전화를 했다. 찬아저씨는 그 잡을 놓칠까봐

당장 오겠다고 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아저씨의 한숨 소리에 내가 해결 할

테니 오지 말라고 했다. 베큠을 가져다가 두어 번 밀었더니 금세 깨끗해졌다. 그걸

본 매니저는 머쓱해하며 오케이, 했다.

 지난달 회사 시스템이 바뀌었다. 새시스템에 적응하느라 일이 늦어져서 오버타임

을 하게 됐다. 베어리에게서 이메일로 경고가 왔다. 회사에서 원하지 않으니 비상시

가 아니면 제시간에 퇴근하라는 내용이었다. 화가 났다. 가장 바쁜 월요일에 그는

결근을 했고 나 혼자서 새로운 시스템으로 작업 하다 보니 한 시간 정도 일을 더해

야 했던 것이다. 그가 나의 상사이니까 어지간하면 넘어가겠지만 이 번 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다른 파트의 누구는 매일 한 시간 이상 오버타임을 해도 그의 보스가 말

하지 않는데 어째서 당신은 내게 그렇게 하느냐고, 그날 것을 마감하려니 시스템이

늦어 어쩔 수 없이 오버타임을 하게 됐다고 따졌다. 금방 이메일로 답이 왔다.

" Soon, you  did your best. OK…"

 요즈음 베어리는 자주 출근 시간이 늦어지며 늘 이유를 달았다. 오늘은 프리웨이에

사고가 났었다느니, 약속이 있는데 트레픽 때문에 일찍 퇴근해야 되겠다느니 하며

구차한 변명을 한다. 그것은 누가 자기를 찾으면 그렇게 대변해 달라는 말이었다.

 올해 들어 그의 일하는 모습이 몹시 힘이 들어 보인다. 이제 그도 은퇴할 시기가 되

는 듯하다.

금요일, 주말이 되면 모든 직원들은 8시간을 채우기 무섭게 퇴근을 서두른다. 베어

리는 늦게 출근해서 일찍 퇴근하니까 제 시간을 채우지 못한다. 나야 그가 시간을

채우던 말든 관심 밖이지만 베어리는 나를 두고 먼저 퇴근하는 게 마음이 걸리는 모

양이었다.

" 순, 트레픽 때문에 난 지금 나가야 해, 해브어 굿 위크엔드."

말하는 그의 표정이 우스웠다. 마치 높은 사람을 대하듯 쭈뼛거리며 머뭇거렸다.

" 오케이, 먼저 가세요."

나는 그의 보스라도 된 듯 시원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