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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권의 영혼의창-바라봄

2013.12.05

상세 본문

바라봄

 

죽은 시체 곁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

런데 성도 중에 영적으로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움이 가득 찰 때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시체를 사랑하는 네크로필리아 증세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움이 가득 찰 때 그 미움의 마음을 두 손으로 붙잡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네크로필리아는 아니지만 죽은 시체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일 수 있

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많은 성도들이 성화(sanctification)를 이루기를 바라면서

도 자신의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거룩해진다는 의미인데, 만일 어떤 사람이 그 거룩함을 자신의 노력이나 율

법적인 방법을 통해 차곡차곡 성취해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도가 의롭게 된 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칭의는 예수님이 피를 흘리셔서 오직 믿음으로만 나아오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신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아무 것도 칭의사건과 견줄 수 없습

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칭의는 믿음으로, 은혜로 거저 받았다고 쉽게 말하면

서, 그 이후의 일들인 성화는 인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

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도들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 역시 믿음으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혹자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빌립보서 2장 12절 말씀으

로 성화에 있어서 인간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

에는 모순되는 듯이 보이지만 모순되지 않은 역설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성화와

관련된 대표적인 예로 히브리서 10장 10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이미

거룩하다고 완료형을 쓰면서도, 같은 장 14절에서는 원수가 예수님의 발등상이 될

때까지 성도들이 거룩해지고 있다고 진행형을 써 역설을 이루고 있습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빌립보서 2장 12절 말씀도 바로 그 다음 절인 13절과 역설을 이루고 있습

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

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그

구원을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친히 이뤄 가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화의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 역시 성경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입

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

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영광에 이르는 길은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를 바라보는지에

따라 그 누구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성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계속해서 말하고 묵상하고 바라보고 찬양함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초자연

적으로 이뤄지는 사건입니다. 내 안에 드러나는 죄는 십자가에서 죽은 죄의 몸에서

발현된, 죽은 옛 사람의 흔적일 뿐입니다. 시체인 것입니다. 그걸 해결하겠다고 붙

잡고 있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영혼이 예수님의 영광과 그의 사

랑과 은혜를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어떤 의미에서는 거룩해지는 것은 우리가 이미

거룩하다는 것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데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즉 칭성(이미 거룩함)

을 통해 성화(거룩해짐)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고도화될수록 어른처럼 자립하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같이 하루 종일 받기만 갈망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그렇게 안식하는 자들이 적습니다. 우리의 육체적 성향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인도하심이 아니라 자신을 의지하려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이 좁고 어려운 이유는 그 길이 예수님만 바라보면 된다는 쉬운 길임을 인정하기가

좁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벼움을(마 11:30) 은혜 안에 있을 때

비로소 눈뜨게 됩니다.

 

/차명권 전도사(온누리교회, HEART min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