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권의 영혼의 창-허벅지, 은혜가 꽃피다
2013.12.24상세 본문
가장 치 떨리고 절망적인 밤이었다. 2천 여 년 전 그날. 베들레헴의 두 살 배기 이하
남자 아이들이 순결한 피를 흘리며 헤롯의 손에 학살당하던 그날 밤은 희망이나 소망
이라는 단어가 역사에서 증발하는 비참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메시아가 탄
생했다. 인간의 눈에는 가장 비참하고 죄악으로 가득 찼던 그 밤이 사실은 가장 위대하
고 소망으로 가득 찼던 밤이었다. 인간이 끝도 없는 고통의 눈물을 흘리던 그날 밤에
하늘은 영광으로 가득차고 땅에는 평화의 트럼펫이 울려 퍼졌다.
인간이 끝났다고 할 때에도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계획을 펼치시고, 인간이 자신의 고
군분투로 이만큼 살아왔다고 할 때에도 실은 애당초 죽은 시체를 살려내 거기까지 데리
고 온 전적인 분이 은혜의 하나님이었음을 인간은 잘 깨닫지 못한다. 얼마나 큰 은혜
로, 아니 전적인 은혜로 서 있음에 감격하지 못하고 반복되는 TV뉴스의 사건사고에 주
먹을 불끈 쥐고 마음의 삿대질을 해대고 있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얍복 나루의 야곱은 우리를 참 많이 닮았다(창세기 32장). 참 열심히 자
기의 지혜와 힘을 적당히, 어떤 때는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온 야곱의 인생이 실은 하
나님의 선하심과 용납하심과 전적인 은혜로 이끌려 왔음을 야곱의 허벅지 사건이 잘 말
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면서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야곱이 절게 된 사건은 단순히 절뚝
거리게 되었다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야곱의 삶을 이끄시어 결
국 마른 뼈와 같은 어둠의 상황에서 영광스러운 교회를 탄생시키시는 감격적인 역사와
맞닿아 있다.
당시 족장시대는 특히 생식기능이 중요했다. 씨가 번성하지 않는 족장은 권위와 힘이
서지 않았고, 축복에서 멀어져 있었다. 족장이 나이가 들어서도 여인을 통해 아기를 낳
으면 당시의 문화에서는 족장의 건재와 권위와 하나님의 축복의 현존을 말해주는 것이
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문화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두고 맹세를 할 때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맹세를 했다. 왜냐하면 허벅지는 생식능력을 상징하는 신체부위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에게 이삭의 신부를 구하라고 하란으로 보낼 때에도 허벅지에 손
을 넣고 맹세를 한 것이 한 예다(창 23장). 이때의 허벅지는 히브리어로 ‘야렉’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창세기 32장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이 야곱의 신체부위를 치신 곳도 ‘야
렉’이라는 허벅지였다.
따라서 야곱이 허벅지를 다쳐서 절었다는 것은 야곱의 생식기능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고찰은 기존에 제기되지 않았던 새로운 해석인데, 히브리어 원문
과 이어지는 문맥들을 묵상해보면 상당한 설득력을 발견하게 된다.
얍복이라는 단어는 ‘텅 비어 있다’(empty)라는 뜻이다. 그 얍복 나루에 그날 두 아내
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이 당도했다(창 32:22). 열한 아들이면 얼핏 참 많은 숫자의
꽉 찬 아들로 보이는데 하나님의 눈에는 얍복이라는 단어처럼 텅 빈 것 같았다. 왜? 야
곱의 텅 빈 영적상태를 말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단 하나의 뭔가를 기다리며
예비하고 계시다는 다른 의미가 짐작된다. 열한 아들을 보시고서도 하나님은 무엇을 기
다리며 준비하고 계셨을까.
해답은 바로 12번째 아들로 태어날 베냐민이다. 베냐민은 은혜의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
로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야곱은 많은 아들을 낳았고, 예수님의 계보가 되는 유다도 낳았고, 예수님으로 상징되
는 요셉도 낳았지만,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일으킬 세대는 베냐민이었고, 베냐민이 태어
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텅 빈 상태였던 것이다. 그토록 애타게 교회인
우리를 기다리며 모든 마음을 쏟으셨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
다.
문제는 밧단아람에서 열한 아들을 낳은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다가
생식기능이 상실되었는데 어떻게 이후 베냐민이 탄생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 문제의식에 바로 교회 탄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하나님은 교회가 인간의 힘과 지
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탄생되고 유지되는 것임을 만방에 알리기를 원하셨
던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이삭이 은혜로 태어날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부부
의 모든 생식기능이 죽은 상황에서 태를 열어 이삭을 탄생시키셨던 것처럼 베냐민이 태
어나기 전에 야곱의 생식기능을 상실시키셨던 것이다.
그래서 얍복 나루 사건 이후에는 야곱이 아기를 낳았다는 기록이 없다.낳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자 하나님은 생식기능이 없는 야
곱을 통해 베냐민이 태어나게 하셨다(창 35:18). 야곱의 무너진 생식기능을 초월해 전
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베냐민이, 즉 교회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베냐민이 태어나고 은혜의 상징인 라헬은 사명을 다해 죽음을 맞이한다(창 35:19). 라
헬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요셉을 낳고 또 이렇게 베냐민을 낳았다. 라헬은 요셉을 낳
았을 때 “또 다른 아들을 원한다”는 의미로 요셉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요셉은 ‘더하
다’라는 의미를 가진 ‘야삽’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라헬은 또 다른 아
들을 낳기를 바랐고, 결국 베냐민을 낳고 하나님 곁으로 갔다.
요셉과 베냐민은 엄마가 같다. 은혜 아래에서 태어난 두 아들은 이렇게 예수님과 교회
를 상징한다.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그토록 애타게 베냐민을 찾고 찾고 또 찾
아, 보기를 원했던 이유가 바로 교회를 기다리고 가까이 두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재밌는 것은 베냐민이 요셉의 아우임에도 불구하고, 애굽으로
내려온 베냐민을 본 요셉의 첫 마디가 베냐민을 향하여 “내 아들아”라고 한 사실이다.
베냐민을 “내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다른 아들을 원한다”는 요셉의 이름 자체의 실현
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베냐민 세대인 우리들은 이처럼 허벅지의 은혜로 태어났다. 절뚝거리는 야곱을 볼 때마
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죽은 생식기능처럼 무화과나무에 아무 열매 없고, 외양간에
소 한 마리 없는 절망적이고 비참한 어둠의 시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
두 지시고 이기시고 그 어둠에서 살아나시어 마른 뼈 같고 묘지의 시체에 불과하던 우
리를 살려내셨다는 사실을.
그 예수님이 우리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끝없이 불러주시고 돌보시고 계심을.
그 보혈의 공로를 생각하면 우리의 입술로 던지는 “절망뿐이다”는 말이 언제나 거짓말
에 불과함을.
/차명권 목사(온누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