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건너 오두막-여고동창
2014.01.06상세 본문
여고동창/ 홍순복
" 홍순복씬가요?"
내가 헬로우, 하고 휴대폰을 받자 상대방은 가는귀가 먹은 사람처럼 아주큰소리를
지르며 내 이름을 반복해 확인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상대는 한국에 있는 내 친
구 S의 이름을 먼저 대며 나, J이야, 라고 했다. 순간 난 아득한 어린 날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J라면 선머슴같이 퉁퉁거리며 까불고 상대의 약점을 대놓고 말하던 중고
등학교 동창이다. 그래서 그녀의 말에 상처를 받는 친구들이 있었다. 소심한 나는
그녀에게 당한 아이 중의 하나였다. J와는 여고 졸업 후 연락 없이 지냈지만 친구 S
를 통해 그녀에 대한 소식은 간간히 듣고 있었다.
30년이 넘은 세월이 무색하게 그녀와 나는 여고생으로 돌아가 야, 너, 뭐라고? 하고
낄낄대며 전화선이 흔들리도록 웃었다. 그녀는 이곳에 지사를 낸 회사 홍보를 위해
왔다고 했다. J는 자신의 사무실이 한인 타운에 있다며 얼굴한번 보자고 했다. 돌아
오는 주말에 그녀 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데니스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당장 약속을
했다.
혼자 운전해서 엘에이에 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여고동창이 30년이 넘어 왔다
니까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에게 가는 길을 자세하게 써달라고 했다. 길을 잘
못 들어 고생할까봐 후리웨이를 내려서는 사인 판을 자세히 살피며 운전했다.
만나기로 한 데니스레스토랑에 도착하여 J를 나오라고 하고 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
갔다. 토요일 정오라 식당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출입문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유리문 밖을 바라보며 J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내가 전화
통화시 J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나 슬쩍 물었을 때 그녀는 자기 몸이 에스라인 이라
며 자랑하듯 내게 말했었다. 여고 때도 제법 통통했었는데 중년의 그녀가 자기 몸을
에스라인 이라고 하니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이제나 저네나 J의 모습을 담은 사람
이 나타나기를 살피고 있는데 길 저편에 핑크색 양산을 쓴 여자가 걸어왔다. 양산으
로 얼굴을 가려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혹시 저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
었다. 이곳에서는 양산을 쓰는 이들이 많지 않아 한국에서 온지 한 달 밖에 안 된 J
일 가능성이 컸다. 핑크색 양산이 접혀지며 식당 출입구로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와
나는 서로 눈을 맞추었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그녀
가 나를 향해 웃어 보일 때 보이는 덧니가 그녀임을 확실히 증명했다.
앞에 앉은 그녀는 50이 넘은 중년이라기보다는 나이 먹은 노처녀 같은 모습이었다.
이곳에서는 잘 입지 않는 로얄불루셔츠를 입었는데 목선이 둥글게 파여서 예쁘고
우아하게 보였다. 짧은 커트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커다란 구슬귀걸이를 했다. 화장
은 세련되게 진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했다. 부리부리한 눈은 화장으로 더욱 크게 보
였다. 바지는 좁은 검정색에다 재킷은 비둘기 색으로 반짝이가 칼라위에 촘촘히 별
처럼 박혀있었다. 그녀의 몸에 아주 딱 맞았다. J는 날씬했다. 이 모습이 에스라인
이라 하는 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에 비해 나는 통이 넓은 편한 바지에 반
부츠를 신고 위엔 앞 단추가 꽉 끼인 자주색 셔츠에 검은색 카디건을 걸쳤다. 그녀
는 내 옷차림을 훑어보며 전형적인 미국스타일로 편하게 입었구나, 라고 말했다.
" 네 눈을 보니 알 수 있어. 별로 변한 게 없네."
" 너 그 덧니 그대로구나. 치아 교정좀 하지 그랬어."
덧니라는 말에 그녀는 펄쩍뛰며 그것이 자신의 매력 포인트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웃는 모습이 꽤 매혹적이었다. 선머슴 같이 털털하며 조금은 촌스럽던 옛날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세련되고 꽤 도회적인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눈길은 여자인 내
게도 도발적으로 보였다.
별로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여고동창이란 이름아래 우린 편하게 대화를 나
누었다.
그녀는 자신의 회사 제품인 효소를 먹고 자기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12년 전에
설립한 회사인데 10년간의 오랜 연구 끝에 효소를 출시한 지 2년이 되었다며 미국
엔 이제야 상륙했다며 직업의식으로 눈을 반짝였다.
J는 나에게 자신의 사무실로 가자고 했다. 한인라디오방송국이 있는 건물 3층에 위
치한 그녀의 사무실에 들어가자 설명회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상담
을 하고 있었다. J는 사업광고 앨범을 보여주며 한 글래머 중년여자를 가리켰다. 그
것이 얼마 전까지 자기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 옆에는 그녀말대로 에스라인 몸매의
예쁜 드레스를 입은 지금의 그녀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몸짱이 됐을
까? 놀라는 나를 J는 설명회가 시작되는 방으로 밀어 넣었다. 엉겁결에 사람들 틈에
끼여 세미나를 들었다. 다단계식 네트워크 사업이었다.
대기업과 함께 하는 사업체로 화장품과 그 효소제품이 주 종목을 이루고 있었다.
회원이 되면 물품을 싸게 구매할 수 있다기에 등록을 한 나는 효소 두 박스와 화장
품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30년 만에 여고동창을 만나 뜻하지 않게 다이어트제
품을 사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J를 만나고 난 이틀 후 내가 효소를 잘 먹고 있나 점검을 하려는 것인지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먹지 않고 남편에게만 준다고 했더니 갑자기 J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네가 먹어야지, 누구를 준다고? 너 자신을 사랑해, 네가 없으면 다 소용없어!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하라고!"
" 얘, 그걸 내가 먹어야 꼭 나를 사랑하는 거니?"
" 그럼, 네가 먹고 날씬해져야지 건강도 좋아지지. 그게 너 자신을 사랑하는 거지!"
" 야, 우리 남편도 다이어트가 필요해.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나보다 남편이 먼저
건강해야 돼 그래야 돈을 잘 벌어 오지. 그게 진정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 아니니?"
우리는 서로 전화기속에서 한참을 깔깔대고 웃었다.
2011-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