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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뺑덕어멈을 따라가다

201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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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덕어멈을 따라가다/ 이용우

 

-하나님 그저 마음착하고 신앙 좋은 사람이면 됩니다. 그런 여자 하나 보내주세요-

나는 아침 마다 그렇게 기도를 했다. 아이엄마와 부모님 등 돌아가신 이들을 위한

연령기도, 가까운 병자들을 위한 치유기도, 남북통일과 세계 평화에 이르기까지 마

음 내키는 대로 제목을 붙이는 종합기도 속에 슬쩍 끼워 넣어서, 아이를 등교 시키

고 버뱅크공항 근처의 직장까지 가는 이십여 분의 출근길에 일과처럼 하는 묵주기

도이다. 나는 가끔 기도가 끝나고도 마음이 시원찮으면 '하나님, 저 아무것도 안 따

집니다. 그저 밥이나 해주고 아이하고 놀아 줄 여자면 됩니다. 제 기도 듣고 계시지

요?' 하고 개평기도를 하기도 했다.

 아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벗기고 입히고, 그리고 먹여서는 화장실로 데려가 뒤처

리를 살펴야 했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 제법 말귀도 알아듣고 제 입성정도는 챙길

줄 알게 되었다, 아주 힘든 시기는 지나간 셈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꾀가 나기 시작

한 것이다. 심봉사가 청이 젖동냥 다니듯 내가 가는 모든 곳에 아이를 끌고 다니는

것이 싫어졌다. 하루 여덟 시간 풀타임 일을 마치고 학교에서 아이를 픽업하여 마켓

따위를 돌아 불 꺼진 집을 들어서는 일과에 짜증이 난 것이다. 그런데 이제껏 모른

척하시던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

인연은 아주 먼 곳으로부터 전화선을 타고 달려왔다.

 "어이, 나 김중탠디 거기 자네가 사는 엘에이에서 얼바인 이라는 곳이 먼감?"

한 밤중에 전화를 걸어온 서울의 김중태 소설가는 다짜고짜 그렇게 들이대었다. 충

남 공주 출신인 김중태 소설가는 성격이 급한 분이였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내가

어, 하며 대답이 늦어지자 그 양반은 참지 못하고 다음 말을 쏟아 내었다.

 "이이, 뭔 소린가 하면 말이여, 마땅한 여자가 하나 있어. 그런디 그 사람이 얼바인

이라는 곳에 산다 이 말이여. 자초지종을 설명헐테니께 들어봐. 어, 참 내가 지금 동

부의 딸네 집에 와있어. 이, 그런디 뉴욕에서 열린 문학모임에 참석했다가 옆자리에

앉은 분과 대화를 나누게 됐어. 김자영이라고 하는 분이신디 연세는 드셨어도 아주

잰틀하신 분이야. 그런디 그 양반이 뭔 얘기 끝에 당신의 여고 제자가 얼바인에 사

는디 소설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거야. 수필로는 이미 등단을 했는디 소설도 써보고

싶다는 말이지. 그래 나 보고 엘에이 쪽에 아는 소설가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하시

잖겠어? 그 말을 듣자 자네 생각이 퍼뜩 나더라고, 그래서 좋은 소설가가 있다고, 내

가 소개해주마고 했지. 그래서 지금 모임 끝나고 돌아오는 길로 전화하는 거야."

그쯤에서 숨을 한차래 돌린 김중태 소설가는 이내 다음 말을 이어 갔다.

 "그런디 소설을 배우겠다는 그 김 선생님의 여고 제자가 싱글이래여, 나이가 자네

보다 대여섯 살 적다지 아마. 지금 얼바인에서 노모를 모시고 사는데 벌써 이십년

넘게 미국직장에 다니고 있다누먼, 아주 착실하고 마음씨도 곱데여. 김 선생님도 서

로가 싱글이니께 이성으로 사귀어 보는 것도 좋겠다고 하셨어… 자네 생각엔 어띠

여? 소설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만나서 사귀어 보라구, 이미 수필로 등단했다니께

기본기는 갖춰졌을 테고 말이여. 워뗘? 내 말대로 혀봐, 느낌이 괜찮으니께 적극적

으로 한 번 해보라구. 알았지?"

 서울의 김중태 소설가가 뉴욕의 따님 댁에 다니러 왔다가 그곳의 문학모임에 참석

하게 되었고, 거기서 잰틀하신 어른의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이 인연의 첫 단추를 끼

우게 된 사연의 전말이었다.

다음날 김중태 소설가가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앤서링머신에 메

시지를 남길까 했지만 말이 너무 장황해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녀와의 첫 대면이 이루어 진 것은 며칠 후 엘에이에서 있은 미주문학신인상 시상

식자리에서였다. 아니 한국교육원에서의 시상식이 끝나고 '황태자'라는 양식당의 뒤

풀이장소로 자리를 옮겨 서였다. 그날의 수상자 중에 그녀와 가든그로브의 글사랑

모임에서 알고 지내는 이영실 씨가 소설부문에서, 그리고 이주희 씨는 수필부문 당

선자여서 축하객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이영실 씨를 통해 그녀가 참석하도록

미리 부탁을 해두기도 했었다.

"안녕하세요, 홍순복 씨?"

 내가 이영실 씨의 안내로 오렌지카운티에서 온 문인들이 둘러앉은 테이블로 다가

가 그렇게 인사를 하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활짝 웃으며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머

릿속에서 만 그려보던 그녀를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속으로 짧은 탄

식을 쏟았다. 왜냐하면 거기 아주 낯익은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사촌형수

를 닮은, 아니 고향의 버스정류소에서 언제라도 마주칠 수 있는, 순복이라는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고도 남을 얼굴이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그녀가 내어준 옆자리에 앉아 소개받게 된 사연을 간략히

설명한 후, 다시 통화하자는 말로 첫 만남을 마무리하고 내 자리로 돌아오며 하나님

께 물었다.

"하나님, 저 여자가 그 여잡니까?"

-인물은 그저 그런디 마음씨는 착하디야, 성격도 솔직허구 말이여. 그런 여자가 편

하지. 이봐, 역사 이래로 미색에 신세조진 놈은 있어도 박색에 망했다는 놈은 읎써.

그러니께 암말 말고 잘해보라고-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던 김중태 선생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또 한 번 독백했다. 하나님 저 여자가 그 여잡니까.

 아무려나 미색에 빠져 신세조진 놈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일념에 나는 그녀와의 교

제를 시작했다. 김중태 소설가의 권유대로 나는 가든그로브에 소설창작교실을 열었

다. 오렌지글사랑 모임장소인 정찬열 형의 보험회사 사무실을 격주로 빌려 토요일

오후에 소설강의를 하기로 한 것이다. 단 둘이서 만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오렌지

글사랑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을 권유해서 대여섯 명으로 클라스를 만들었다. 우선 6

개월을 해보기로 하고 소설창작반을 시작했다.

 나는 그린(딸)을 누님 댁에 맡겨두고(누님의 적극적인 협조아래) 두 주에 한 번씩

토요일 오후가 되면 만사 젖혀두고 가든그로브를 오르내렸다.

 처음에는 소설공부를 마치고 함께 커피샾으로 몰려가곤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이서 만 만나게 되었다. 클라스가 끝나면 서로 바쁜척하고 헤어져서는 미리 약속

해두었던 장소에서 만나곤 했다. 물론 소설클라스에 나오는 몇 사람은 우리의 그런

교제를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하고 있었다. 아니 그 중 두어 사람은 우리의 교제를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다.

 그런 주위의 협조와 함께 별로 처지가 풍요롭지 않던 우리 두 사람의 간격은 급격

히 사이를 좁혀갔다. 처지가 궁색하기는 당연히 그녀 보다 내 쪽이 훨씬 더 심했다.

앞에서 고백한 대로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아이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도 2~3년 앞이니까 실제로는 프리스쿨에 다닐 때부터) 아이를 키우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정말로 밥 해주고 아이와 놀아줄 사람이면

되었다.

차에 오르기만 하면 잠에 곯아떨어지는 아이를 안아 내려 불 꺼진 방문을 열고 어둑

한 실내로 들어설 때의 아득한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더구나

그 당시 나는 경제적으로도 한껏 쪼들려서 시인 이성열 형의 하우스 문간방을 빌어

사는 신세였다. 다섯 개의 크레딧카드도 모두 한도액을 턱밑까지 긁어 써서 매월 미

니멈페이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심봉사 보다 나을 것이 눈곱만치도 없는 내 처지를 그녀가 떠안겠다고 나섰다. 아

이가 있어서 더 좋다고 했다. 자기가 낳은 딸처럼 키워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갖고 싶어도 주어지지 않던 아이가 생기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

신 것이라고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기도라니, 기도라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아침 마

다 출근길에 올린 묵주기도가 내게도 있는 것이다. 누구의 기도를 받으셨는지 모르

지만 어쨌든 하나님이 불쌍한 중생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나는 손톱만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그녀의 자비를 몽땅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여자는 절대 뺑덕어멈이 아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뚝 떨어뜨려준 여자

다, 그렇게 믿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학군이 좋은 얼바인으로 와라, 우선 내 아파트로 들어와 살다가

곧 넓은 집으로 옮기자, 아무걱정 마라, 믿음으로 행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이렇

게 나의 근심 걱정 무거운 짐을 예수처럼 떠안던 그녀가 교회문제에 가서는 딱 버티

고 선 것이다. 다른 것은 모두 당신하자는 대로 할 터이니 종교만큼은 개신교로 오

라는 그것 이었다.

 나 역시 그 문제를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단호한 입장에 부딪히니까 몹

시 당황스러웠다. 어떤 유명인사는 부부가 서로 다른 종교를 갖으면서도 화목하게

살아가고, 그런 종교적 자세가 오히려 멋져 보이기까지 한다지만, 당장의 소망이 문

간방 신세를 벗어나는 것이요, 같은 반찬 두 번 먹기를 거부하는 까다로운 딸을 둔

홀아비신세에 그것은 상상도 할 수없는 종교적 사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그 문제로 한 동안 고민 아닌 고민을 해야 했다. 5차원 방정식을 푸느라 머리를

싸쥐었다. 하나님이 누구의 기도를 들으셨나 그것이 궁금했다. 그녀의 기도를 들으

셨다면 개신교로, 내 기도를 들으셨다면 천주교로 가야 맞지 않겠는가. 그 대답을

듣기위해 또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인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그런데 나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구름위에다 대고, 참말로 이 문제

를 어째야 합니까? 하고 속앓이를 하던 어느 순간에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치듯 한

말씀이 있었다. 그것도 이주일 버전으로 답을 주셨다.

"야, 너 지금 따지냐? 너 증말 답답하다. 니 주제를 알아야지 주제를!"

개신교 예배당에 앉든 가톨릭 성당에서 무릎을 꿇던 하나님을 바라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느 곳에서 기도를 해도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지 모스크바 예

수나 상파울로 예수로 하지는 않는 것이다. 아,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도 내 주제를

살펴야 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뺑덕어멈 치맛자락이라도 잡고 늘어지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 가 보자. 나는 내 삶의 남루한 보따리를 꼭 움켜쥐고 사촌 형수 닮은

여자를 따라나섰다.

 

2011-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