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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만남이라는 것

201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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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라는 것 / 이용우

 

 지난 토요일 우리 가족은 엘에이 나들이를 했다. 어느덧 8주년 기일이 돌아온 아이

생모의 산소도 둘러보고, 올라간 길에 그린이 외할아버지도 뵙고, 헤어진 지 6년이

넘은 헬렌 가족과의 재회 등 빼곡한 일정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운전하는 옆자리에서 가수면 상태로 앉아가던 나의 머릿속에 슬그머

니 걱정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눈을 번쩍 뜨며 뒷자리의 그린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린아, 너 헬렌에게 새엄마 생겼다고 말했어?”

 내 말에 그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씨익 웃는다.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

다는 얼굴이었다. 그동안 그린과 헬렌 사이에 몇 차례 이메일이 오고 가는 것을 알고

는 있었지만 아빠가 재혼했다는 얘기를 했느냐고 물어보지는 않았었다. 나는 그것이

야 가장 큰 뉴스이니까 당연히 얘기했으려니 여겼던 것이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쳐

다보았다. 아내는 듣고 보니 자신의 입장이 애매하게 되었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

었다.

“나는 오지 말걸 그랬지?”

“무슨 소리야, 당신을 소개하는게 오늘 만남의 가장 큰 목적인데.”

“허지만 그 사람들이 내가 있다는 것을 모르잖아.”

“허어, 그것 참… 어쩔 수 없지 뭐, 만나는 자리에서 소개하는 수밖에.”

 7년 전 우리(나와 그린)가 살던 집은 올림픽과 크렌셔가 만나는 엘에이 한인타운의

서쪽에 있었다. 두부모처럼 네모반듯한 건물에 아래층 두 가구, 위층 역시 두 가구가

사는 4유닛 아파트였다. 아래층의 왼쪽이 우리, 오른쪽이 헬린네 집이었다.

 헬렌은 그린이 보다 네 살이 어린 아이다. 엄마인 에이미는 연방공무원이었고 아빠

인 루딕은 영화음악을 만드는 프리랜서 작곡가였다. 부부 모두 지적이며 온화한 성

품의 텍사스 출신 백인이었다. 낭만적 기질이 다분한 루딕은 푸른 몸통에 부리가 노

란 관상용 새를 어깨에 올려놓고 기타를 치곤했다.

 그때 윌셔초등학교 저학년이던 그린이 프리스쿨에 다니던 헬렌을 동생처럼 귀여워

하며 같이 놀아주었다. 그린은 헬렌과 같이 아파트 뒤뜰에서 세발자전거도 타고, 인

형놀이도 하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그린이 헬렌을 사랑스러

워하고 세심하게 보살펴주는 것을 익히 아는 에이미와 루딕은 그린이 학교에서 돌아

오기만 하면 헬렌을 우리 집으로 보낼 정도였다. 물론 그린이 헬렌 네서 밥 먹고 게

임하고 노는 일도 허다했다.

 그렇게 3~4년을 잘 지냈는데 2005년 들어서며 부동산 붐이 막바지에 달하자 우리

가 살던 아파트가 서너 달 간격으로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며 분위기가 어수선해지

기 시작했다. 결국 그 아파트 세입자 네 가구가 모두 그 집에서 나가야할 형편이 되

었고, 마침 일거리가 시원찮았던 루딕은 가족을 이끌고 부모형제가 있는 텍사스로

돌아가게 되었다. 헬렌 네와 함께 역시 다정한 이웃으로 지내던 우리 위층의 욜란다

네 세 식구와 헬렌네 위층의 프레디와 메긴 가족도 떠나야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헤어지기 전 네 가족이 이별파티를 하며 함께 사진도 찍고, 서로의 전화번호랑 이메

일 주소도 교환하며 꼭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로 아쉬움을 달랬는데, 그 약속이 다른

집과는 지켜지지 않았지만 헬렌 네와는 이어졌다. 바로 그린과 헬렌 때문이었다.

 텍사스로 돌아가던 해에 유치원에 입학한 헬렌이 그린의 이메일에 떠듬거리는 글로

답장을 하는 재미가 들렸던 것이었다. 땡스기빙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때면 전자카드

나 더러는 우편카드 따위로 연락을 이어가던 인연의 끈이 결국 오늘 같은 만남을 가

져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 두 가족이 만날 수 있게 된 결정적 변화는 고향으로

돌아갔던 헬렌 네가 서너 달 전 엘에이 북쪽의 셔먼옥스 라는 곳으로 다시 이사를 왔

기 때문이다.

헬렌 네와 만나기로 한 곳은 3가와 라브레아 부근의 글로브 몰이었고 시간은 오후

세 시였다. 12시 전에 엘에이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그린의 외할아버지와 점심을 같

이 했다. 그리고 여유 있게 글로브 몰에 도착하여 만나기로 한 장소인 극장정문 앞으

로 갔다.

 미국이 온통 불황이라고 하는데 주말의 글로브 몰은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넘쳐나

고 있었다. 흥분된 마음으로 극장 앞에 선 우리는 어느 쪽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헬렌

네 가족을 찾느라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린아, 헬렌이 얼마나 컸을까. 너보다 키가 클까?”

나는 이쪽저쪽으로 연신 고개를 돌리며 그린에게 말했다.

“나보다는 작겠지. 아, 몰라.”

그때 그린의 손에 들린 전화벨이 울렸다. 헬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린이 전화기

를 귀에 댄 채로 목을 길게 빼고는 웨얼? 웨얼? 하며 두리번거린다. 나도 그린의 눈

길을 따라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방향이 모두 제각각인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눈이 어지러웠다.

“하이, 그린! 헬로우 영!”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크게 벌린 루딕의 두 팔이 내 앞에 들려있었다.

“하이, 루딕!”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얼싸안으며 감격의 인사를 나누었다. 곁눈으로

보니 훌쩍 큰 헬렌은 환하게 웃으며 한 발짝 떨어져 있고, 에이미가 그린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다가 상대를 바꾸었다. 나는 에이미와 포옹하

고 그린은 헬렌을 껴안았다.

 그런데 루딕이 소개시키지도 않은 아내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놀랐지만 통성명을 하는 두 사람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다시 서로의 상대를

바꾸었다. 루딕은 그린과, 나는 헬렌을 포옹했고 에이미와 아내가 손을 잡았다.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뒤에 서서 기웃거리는 동양여자가 누구라는 것쯤 짐작

못할 그들이 아니었다. 오래 떨어졌던 만남이 처음 보는 만남을 만난 것이지만 만나

보면 알게 되는 것이 만남인 것이다.

 

2011-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