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건너 오두막-훌륭한 작별인사
2014.01.19상세 본문
훌륭한 작별인사 / 이 용우
어머니(장모님)께서 뉴포트비치에 있는 Hoag Hospital에서 허리 수술을 하신 후,
병원에서 두어 블록 떨어진 재활센터로 옮겼다. 토요일 오전에 세 식구가 재활센터
를 찾았다.
커튼을 사이에 두고 환자 침대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진 방 입구의 첫 번째가 어머니
자리였다. 맨 안쪽의 환자는 어떤 사람인지 보이질 않았지만, 가운데 침대는 흔들리
는 커튼 사이로 웅크려 누운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바싹 마른 백인할머니였다.
삼십대의 건장한 물리치료사가 오더니 어렵사리 어머니를 일으켜 몇 발짝 걷는 연습
을 시켰다. 그러더니 한 시간 동안 휠체어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앉아 있는 것도 운
동의 한 방법이라고 했다. 물리치료사는 백인 할머니와의 사이에 드리워진 커튼을
드르륵 밀어젖히더니 어머니가 앉은 휠체어를 그곳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헐크 같
은 남자의 거침없는 행동에 놀라 얼른 옆 침대의 백인할머니를 살폈다. 다행스럽게
도 할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침대 사이 휠체어에 앉아 있고, 우리는 출입문좌우 벽을 등진 채 의자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끔 발음이 어눌한 어머니의 말을 듣기 위해 상체를 앞으
로 기우리는 것 말고는 무료한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할 수 있는 행동의 전
부였다.
그러다 보니 활짝 젖혀진 커튼 아래 훤히 드러난 백인할머니 쪽으로 자주 시선이 가
게 되었다. 은발의 백인할머니는 우리 쪽으로 등을 돌리고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잠들
어 있었는데 쉴 새 없이 몸을 떨었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지 가냘픈 음성으로 옹알이
를 했다.
그런데 조금 특이한 것은 그 백인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처럼 환자용 가운을 입지 않
고, 금장식이 수 놓인 검정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이번 가을이
면 아흔이 되시는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데 그런 차림을 하고 환자용 침대
에 누워 있는 것이 생경스러웠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책이었다. 붉고 노란 색으로 표지를 입힌 책 한 권이 할머니
의 침대머리 쪽 사이드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렇잖아도 특이한 할머니라고 생
각하고 있는데 그 나이에, 더하여 치료 중에도 책을 놓지 않는다는 사실이 관심을 끌
었다. 저 나이에도 독서를 멈추지 않는 서구인들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저 할
머니는 어떤 책을 읽을까 하는 궁금증이 부쩍 일었다. 커튼을 열어젖혀도 모를 만큼
잠에 취해있는 모습에 용기를 얻어 슬그머니 일어났다. 활자가 식별될 만큼의 거리
까지 다가갔다.
[too late to say goodbye]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 제목만으로도 많은 것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할머니
는 책의 제목처럼 꼭해야 할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순간 작
별인사의 결여로 가슴 아팠던 내 자신의 지난 일들이 화살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백
인 할머니도 그런 사연 하나쯤은 충분히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할머니가 연해 몸을
떨며 옹알옹알 잠꼬대를 했다. 나는 얼른 내 자리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통증이 오는 모양이었다. 방탄조끼 같은 보호대를 상체
에 입혀서 억지로 휠체어에 앉혔으니 수술자리가 더욱 아프고 괴로울 것이었다. 그
래도 나와 얼굴이 마주치자 습관처럼 벙그레 웃으신다. 그 벙그런 미소를 보니 잡은
손을 볼에 가져다 대시며 사랑해, 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다음 꼭 하시는 말
씀이 있다.
“예수님 잘 믿구… 시 식구(세 식구) 서루 사랑허구… 잘 살어.”
어머니가 우리에게 하는 말씀은 언제나 그 ‘시 식구 서루 사랑허구 잘 살어’ 하는 말
뿐이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식구에게는 오직 ‘서
루 사랑허구 잘 살어,’ 가 시작이며 끝이었다. 어머니 댁을 방문하여 안녕하시냐고
인사를 드릴 때에도, 한참 놀다 귀가하려고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를 할 때에도 어머
니는 여일하게 ‘시 식구 서루 사랑허구 잘 살어’ 하신다.
한 일 년여 전쯤 되었을까,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는 색다른 행동을 하셨다. 어머니
를 만난 우리가 반갑다고 손을 잡아드리면, 그 손을 끌어다가 당신의 볼에 대시며 사
랑해, 라고 말하시는 것이었다.
“이힝, 할머니 너무 귀여워.”
할머니의 색다른 행위에 그린은 그렇게 자지러졌지만, 처음에 나는 멋쩍고 무안해서
쩔쩔 매었다. 아내까지도 자기 어머니의 안하던 행동에 ‘엄마 왜 저러지? 이상해 졌
어’ 라고 얼굴을 붉혔었다. 허지만 잠시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자식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긴 것이겠다. 사랑할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애틋한 징표인지도 모른다.
-시 식구… 서루 사랑허구… 잘 살어.-
우리의 손을 가져다가 당신의 볼에 대고 하시는 어머니의 그 말씀은, 만남의 반가움
과 작별의 아쉬움이 한데 섞인, 자식에 대한 어미의 바램과 희망까지를 함축한 축복
의 말씀이며, 광의적으로는 가장 훌륭한 작별의 인사이다. 다른 말은 더 하지도 않고
만날때 마다 그 말씀만 하셨기에 잊혀 질 리도 없다.
2012.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