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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권의 영혼의창-믿음 없음 그대로

201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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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없음 그대로

 

“내 믿음이 약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내 믿음이 강해지면 큰 축복이 주어질 거야.” 모두 믿음에 대한 오해

다. 신앙인이 수백 년을 살더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믿음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육신(flesh)이 영광의 몸으

로 바뀌기 전까지 인간은 빛과 어둠의 공존 속을 살아간다. 하나님에 대한 아무리 큰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

각하더라도 우리는 그 믿음을 비웃듯 공존하는 의심과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고, 이기와 이타가 공존하며, 안정과 불안이 늘 함께 따라다닌다.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 미

움이 공존하는 사랑을 정죄하고, 이기가 공존하는 이타를 질책하고, 불안이 섞인 안정을 가치 없다고 말하는 사

람이 있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신처럼 완전하든지 위선자이든지. 미움이 있는 채로 나아오는 사랑을 격려하

고, 이기가 있는 채로 나아오는 이타를 칭찬하고, 불안이 있는 채로 나아오는 안정을 다독여주는 이가 있으니 바

로 예수님이시다.

오히려 인간의 실존을 아시는 예수님은 빛을 명확하게 보게 하기 위하여 어둠을 허락하시고,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하여 미움을 허락하시고, 확신을 부여잡게 하기 위해 불안의 길을 허용하셨다. 인간이 영광의 몸을 입는 순간

이 되면 우리는 한 점의 부정함도 없는 모습이 되겠지만,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있는 이 땅의 인간이 진리를 획득

하고 하늘의 가치를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이러한 검은 영역을 이용하신다. 이런 어두운 영역과 시간을 부정하

다고 생각하면 그만큼 진리에서 멀어진다. 위대한 교부들의 기록들을 보면 그들의 믿음 뒤에 얼마나 많은 회의

와 절망과 의심이 공존했던가. 그들이 위대했던 것은 그 의심과 회의를 자기 정죄와 자책에 사용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나아갔던 모습 때문이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한 여인이 있었다.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마가복음 5장의 이 여인은 과연 얼마

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실망스럽게도 이 여인은 믿음대신 많은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원어를 보면 이 여

인은 계속 자기 주문을 외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라는 자가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고 다닌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이 병든 여인은 혹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여인의 믿음은 거기

까지였다. 예수라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떠한 예언의 성취를 따라 오시었고, 어떠한 권세와 능력과 사랑

을 가지고, 어디를 향하여 걸어가시는지 등 깊고 강한 믿음은 무리였다. 격리와 절망에 갇혀 홀로 살았던 그 여인

에게는.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능력이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것을 아신 예수님은 뒤돌아서서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 부분을 놓고 “믿음이 강해야 나음을 입는다”고 해석하는 것은 가당찮다. ‘구세주 믿음’은 없었고, 보잘 것 없는

‘옷자락 믿음’밖에 가지지 않은 여인에게 예수님은 얼굴을 비추시고, 그 여인의 믿음에 예수님 자신의 눈높이를

맞추셨다. 의심이 섞인 믿음이 여인의 실존이었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의심에 대해

서는 눈을 감으시고, 겨자씨 같은 옷자락 믿음을 우주 같은 믿음으로 간주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의심과 불신

을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작은 믿음을 낚아채시어 그 작은 믿음을 큰 믿음으로 여겨주신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알려진 아브라함의 믿음도 마찬가지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사실 의심으로 점철되어 있었

다. 믿음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부끄러운. 아들을 주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비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나님

은 비웃음이 섞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큰 믿음으로 보아주셨다. 신약 로마서 4장 18절에는 이렇게 비웃은 아브라

함에 대한 이야기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고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

수님의 보혈이 인류에게 몰고 온 신약(new testament)의 힘이다. 예수님 자신이 보여준 믿음 때문에 성령님은 아

브라함의 불손한 믿음을 예수님의 믿음처럼 보아주시고 그렇게 기록해 놓으셨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그렇게

다뤄질 것이라는 징표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자.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온갖 잡다한 생각들, 불신들, 의심들이 생겨난다. 그것을 결

코 부정적으로 취급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진리에 근접하도록 하기위해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아름다운 것들

이다. 그런 생각들, 불신들, 의심들을 억지로 밀어내지 말고 “예수님, 나는 이렇습니다”라며 있는 모습 그대로 예

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결코 화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한

다. 위선만큼 은혜의 물줄기를 가로막는 것은 없다. 제 아무리 의심과 불신이 많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영

혼 속에 하나님 자신이 주시어 심어 놓으신 작은 믿음을 낚아채시어 당신을 예수님을 품듯 품어주실 것이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는 우리의 실존적 근거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놓은 거짓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

이 하나님에게 증명해보이신 ‘예수님 자신의 믿음’임을 깨닫는다면 제아무리 보잘 것 없는 믿음으로라도 그것을

의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의 날개 위에 타서 하나님 앞에 서는 귀하고 아름다운 현재가 광야의 강물처

럼 흘러나올 것이다.

 

/차명권 전도사(온누리교회, HEART min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