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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권의 영혼의창-제롬과의 이별

201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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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과의 이별

 

계절수업이 끝난 여백은 나의 걸음을 로스앤젤레스 동쪽에 위치한 파사디나의 한 박물관으로 인도했습니다. 노

턴시몬 박물관(Norton Simon Museum). 14세기 루벤스에서부터 20세기 피카소, 앤디워홀에 이르는 아티스트들

의 작품들이 시선을 강렬하게 끌었습니다.

특히 이날 16세기 알브레히트 부츠(Albrecht Bouts)가 그린 “성 제롬의 회개‘라는 그림 앞에서 많은 생각이 덤불

처럼 자랐습니다. 그건 날씨에서 비롯된 대조 때문이었을까. 박물관 밖은 더 없이 눈부신 빛으로 식물들이 춤추

고, 갈색 빛 오리가 뒹굴며 몸을 식히는 연꽃 가득한 연못은 수면 위로 올라온 갈치 떼의 등빛처럼 반짝이며 시신

경을 자극했습니다.

이에 반해 그림 속 제롬 교부는 손아귀보다 더 큰 돌멩이로 자신의 흉부를 피가 나도록 긁어대며 십자가에 달리

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 비통한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성 제롬을 그림으로 대면한 것은 수 년 전 예루

살렘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다른 구도의 그림이었지만 예루살렘 지하에 비치된 제롬의 그림은 역시 해골과 금

욕과 처절한 회개의 이미지로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5세기 초대교회 교부였던 성 제롬은 여성이 성을 포기하고 처녀나 과부로 지내면서 금욕생활을 하면 찬양을 받

는다고 말하는 등 철저한 금욕을 실천하려고 애썼습니다. 4년 간 광야로 나간 성 제롬은 해골과 십자가를 늘 곁

에 두면서 묵상을 했고,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죄가 생각나면 돌로 가슴을 치거나 채찍으로 몸을 쳤습니다. 눈은

왜 뽑지 않고, 손은 왜 잘라내지 않았는지 알 수 없으나 성 제롬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역시 미웠했고,

그 죄가 자신의 영혼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수 년 전 예루살렘 지하에서 제롬의 그림을 보았을 때는 나 역시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었습니다. 성 제롬과 같

이 나도 죄를 멀리 하고 싶었고, 성 제롬과 같이 나도 거울처럼 티 하나, 죄 한 톨 발견되어지지 않는 영혼을 갖고

싶었습니다. 당시 누군가 나를 제롬처럼 광야로 몰아냈다면 나 역시 거친 돌 하나를 준비하여 날마다 내 몸을 학

대하고 내 영혼을 저주했을지도 모릅니다.

교부의 신앙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지만 돌로 가슴을 쳐대는 회개는 신약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그림 속 십자가입니다. 제롬이 나오는 작품의 십자가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 그림들 속 예수 그리스도는 박제처럼 결코 부활할 것 같지 않습니다.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제롬의 영성 속에서는 철저히 부인되고 있습니다. 신약의 십자가는 빈 무덤처럼 빈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슴을 돌로 치기도 전에 예수의 성결한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는데도, 제롬은 예수의 피가 외치

는 “너의 죄가 모두 사하여졌다”는 말씀에 귀가 닫혀 있습니다. 제롬의 그림 속 예수는 제롬의 영적 무지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죄가 생각날 때마다 경건을 위해 돌로 가슴을 치며 회개 했던 제롬의 십자가 접근 방식은 얼핏 경건해 보일지 모

르나 그 경건의 뿌리는 인간의 땀과 노력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제롬처럼 해야 한다면 우리의 교회들은 예외 없

이 가슴이 뻥 뚫린 사람이나, 눈이 뽑힌 사람이나, 손이 잘린 사람들로 넘쳐날 것입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성도들이 죄 사함을 미완성된 것으로 여기며 고통 가운데 가슴을 쳐댑

니다.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의 모든 죄를 사했다”라고 하셨을 때는 어제, 오늘, 또 내일 내가 짓게 될 죄를

모르고 확증하신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태어날 주님의 자녀들의 모든 죄까지도 이미 사해져 있는 것입니다. 죄

를 바라보는 방식은 예수의 피와 부활로 당연히 모두 사해졌다는 기쁨과 감사로부터 출발해 자연스럽게 죄로부

터 해방되고 벗어나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죄들을 날마다 주님 앞에서 결단내야만 한다는 무겁

고 경건주의적이고 아틀라스적인 생각으로 주님 앞에 나가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죄와 관련해 무의식의 영역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평생 의식적으로 인지되는 죄를 남

김없이 회개해 사함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무의식의 죄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의식의 영역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무의식은 성적 기호를 보이지 않게 깔고 광고하는 텔레비전 광고에 무의식적

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행태처럼 우리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넓고 광활한 심연의 영역입니다.

아버지를 미워했다는 이유로 병으로 죽은 아버지를 자신이 살해했다고 여기거나,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성적

환타지에 대한 꿈을 꾸는 등 인간의 무의식은 대부분의 영역에서 비윤리적이며 잔인하며 통제할 수 없습니다.

출생과 함께 뇌에 유전적으로 저장된 태고적 죄들도 무시무시합니다. 그 태고적 기억들은 뇌의 시냅스(뇌의 기

억저장고)에 인간이 절대로 인지할 수 없는 깊이로 묻혀 있다가 그 일부가 꿈이나 의식적 행동 등으로 꿈틀대며

기어 나올 뿐입니다.

그 무의식의 죄들은 어떻게 회개할 것입니까.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죄들은 날마다 회개하면 되고, 무의식의 죄

들은 그냥 싸잡아 한 묶음으로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까. 산상수훈에서 “음욕을 품은 것만으로도 간음한 것”이라

는 말씀은 어쩌면 인간의 무의식의 영역에 묻혀 있는, 인간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깊은 죄들을 겨냥한 말씀일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은 인간에게 맡기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우리 대

신 해결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죄사함의 주도권이 예수님으로 넘어간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급진적이어서 좋은 소식이지 우리의 착

한 일을 사람들이 보고 교회에 나온다는 식으로 타종교와 겹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들이 죄 많은 악마라고

친구이기를 외면한 사람이 죄가 사해졌다는 주님의 말씀에 놀람과 두려움으로 기절하고 마는 것이 급진적인 복

음의 생명인 것입니다. 무의식의 영역의 문제는 이처럼 우리를 복음의 능력으로 겸손히 이끌고 갑니다.

알브레히트 부츠의 “성 제롬의 회개”를 뒤로하고 박물관 뒤뜰에 고즈넉이 앉았습니다. 활짝 핀 노란색 꽃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광채를 내 영혼 속에 각인시킵니다. 꽃은 시들지만 나를 향한 그

리스도의 사랑과 맹세는 영원불변하시니 내 영혼이 주님의 품에 평온히 안식합니다. 조용히 꽃의 향기를 맡아보

라고 설교했던 그분의 영성이 보통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명권 전도사(온누리교회, HEART min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