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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욕심쟁이

201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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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쟁이 / 용우

 

  식탁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데 문밖에 발길 모이는 소리가 들렸다. 열쇠를 끼우고 돌리는가 싶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맨 앞에 효지(아르헨티나에서 온 친구 딸)가 들어서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그 뒤를 그린과 아

내가 따라 들어왔다. 손에 배드민턴 라켓이 들려 있는 걸 보니 B교회 체육관으로 운동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늘 하던 버릇대로 하이,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마주 하이, 하고 미소를 띠었을 그린

과 아내가 본체만체 얼굴을 돌렸다. 의아해진 내가 왜 저러나, 하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린이 내 눈치를 살피며 앞으로 오더니 헝겊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표정이 뚱하니 부어있었다. 손가락으로

노트북의 한쪽 귀퉁이를 가리켰다. 뭐야? 눈으로 그렇게 물으며 힐긋 쳐다보니 노트북 귀퉁이가 깨어지고 이음

쇠부분이 벌어져 있었다.

왜 이렇게 됐어? 나는 조심스레 노트북을 열며 물었다.

엄마가 브레잌을 콱, 잡아서 렙탑이 바닥으로 떨어졌어, 그래서 깨졌어. 그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층으로 올

라가던 아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시끄러워, 가방을 바닥에 두어야지 의자 위에 올려놓아서 떨어진 거잖아.

지금 말하면 어떻게 해, 벌써 말해주지, too late 이잖아.

그걸 꼭 말해야 돼?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했어야지.

나는 몰랐어, 그건 accident야, 내 fault가 아니야.

그럼 엄마 잘못이란 말이야?

노오, 아무도 잘못 없어, 그냥 엑시덴트야.

아무도 잘못이 없으면 왜 엄마한테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니?

화가 나니까 그랬지. 렙탑안에 homework도 있고, 사진도 많이 들었는데 working 안할까봐 걱정이 돼서 화가 났

어.

엄마와 딸이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팽팽하게 맞선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애꿎은 노트북만

들여다보며 둘의 공방을 못들은 척 했다. 아니, 기실은 실실 웃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린이 제 엄마와 말다툼을

하는 중에 ‘벌써 말해주지’ 라고 한 말이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한국어 사용이 서툰 그린이 ‘진즉 말해주지’ 라고

해야 할 것을 ‘벌써 말해주지’ 라고 한 것이다. 가만히 있기도 멋쩍은 터라 그 말을 핑계로 실실 웃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던지 효지가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떠나갔다. 두어 주 전에 얻어준 Yale과 Walnut 부근의 자취

방으로 가는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과일도 깎아먹고, 내가 좋아하는 쌍화차도 한잔 타오고 했을 터인데, 차 안

에서부터 큰 소리를 들었으니 더 있을 마음이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의 이어짐으로 그린에게 물었다.

 그린아, 네가 노트북이 망가졌을까 봐 화가 난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그렇다고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면 되겠니?

더구나 효지가 있었잖아, 남 앞에서 엄마에게 큰 소리를 낸 것은 정말 창피한 일이야.

그런데 내 말에 그린은 정색을 하며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그래서 내가 더 화가 났어, 아빠, Everywhere에 효지가 있어, Every Time에 효지가 우리하고 있어. 짜증나,

효지가 우리하고 너무 많이 있어.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쟤가 효지를 싫어하나? 그러고 보니 효지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하이, 그린, 하고

먼저 인사를 해도 힘없는 소리로 겨우 하이… 하던 그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이는 저보다 4살이 많지만 키가

작고 영어를 못한다고 그린이 효지를 깔본다는 말을 아내와 나눈 적도 있었다. 나는 그린에게 효지 얘기를 할 때

마다, ‘효지언니 왔다 갔니?’ ‘효지언니가 그랬어?’ 하며 일부러 ‘언니’라는 말을 강조했지만 그린은 좀체 ‘언니’라

고 부르지 않았다.

그린아, 너 효지가 우리 집에 오는 게 싫어? 효지가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혼자 사는데 불쌍하지도 않아? 거꾸로

네가 혼자 아르헨티나에 가서 산다면 얼마나 외롭겠어.

그래도 우리 집에 너무 많이 오는 거 싫어, Every day에 오잖아. 내가 학교에서 집에 오면 효지가 벌써 와있어,

Uncomfortable이야.

 그린의 불평이 터무니없지는 않다. 효지에게 집 열쇠를 주어 제 맘대로 드나들게 한 일이 괜찮은지 모르겠다며

애매한 표정을 짓던 아내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렇지만 가정집의 이층 방 하나를 빌어 주인집과 부엌을 함께 사

용하는 아이가 제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해먹을 수 있겠느냐며, 언제든 와서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집 열쇠 주기를 잘했다고 결론 내렸다. 정말 효지는 제 집처럼 드나들며 소파에 누워 자기도 하고, 샌드위

치나 떡볶이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는 말을 아내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그런 효지의 거침없는 행동이 그린은 싫었던 거다. 아니 그보다도 엄마 아빠의 관심이 자신에게 집중되

지 않는 불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린의 마음이 바뀌기를 빈다. 좀 더 기다려 보자.

 

2012.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