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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권의 영혼의창-영원한 정복

201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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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정복

 

학교 도서관에 전시 중인 피터 바그놀로(Peter Bagnolo)의 그림을 감상했다. 작품명은 ‘나사로야, 나오너

라’(Lazarus! Come Forth). 죽은 나사로를 살려 무덤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이 걸어 나오는 나사로

의 정면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이 기적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 사건 이후로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본

격적인 모의를 했다.

전시 중인 바그놀로의 이 작품은 고증에 작은 흠이 있는 것 같다. 그림에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얼굴을 드러낸 채

걸어 나오는데 사실 나사로는 그럴 수 없었다. 요한복음 11장 44절은 나사로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수건을 풀어주기 전까지는 온몸이 꽁꽁 베로 동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은 그림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스라엘의 나사로 무덤에 가보면 무덤 깊은 곳에 시체

가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명하셨을 때 나사로는 온 몸이 꼼짝도 하

지 못한 채 공중에 붕 떠서 지상으로 올라 왔을 것이다. 공중부양을 하듯이 말이다. 공중을 나는 비행기도 발명되

지 않은 때에 시체가 공중을 붕 떠서 무덤에서 나오다니. 이에 더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살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던 나사로는 살아나지 않았던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며 우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원래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그 결과로 인간이 죽음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평이 사

라지면서 인간의 영생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징벌이 여전히 번뜩이며 유효한 상태에 있었

기 때문이다. 사탄이 율법을 통한 인간의 죽음을 계속 상기시킴으로써 예수를 통해 건설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서 인간들이 떠나 하나님을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일종의 영광스러운 징표다. 변화산 사건이 십자가 죽음 이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예표하는 것처럼,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믿는 자들도 이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

는 새 언약를 예표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사단은 전략을 수정해왔다. 에덴동산에서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진실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되는 것이었다. 사단은 예수 이후 이러한 전략을 수정했다. 이제는 영접한 자들에

게 다가가 “너희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유혹한다. 죄를 지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기도 안하고 말씀 안

읽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헌금생활이 부족하면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열매가 없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하

고, 의심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면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모든 것을 동원해 “너희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속

삭인다.

거짓 교사들을 통해 사단은 이러한 전략을 종교적으로 충실하게 쓰는데,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가

르침에 쉽게 동화되고 모인다. 육신은 땅을 갈아 땀을 흘리는 것을 무척 선호하기 때문이다. 거저 받는 믿음이나

영원불변하는 언약 따위는 오히려 신뢰하지 못하고 안식하지 못한다.

오직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또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사단은 율법을 동원해 심어준다. 예수님이 99.9% 하

시더라도 마지막 0.1%만은 나의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율법은 강화시켜준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가 은혜 되

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되고 만다.

고린도후서는 율법적인 접근이 오히려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3:6)

예수 이후 사단은 대공의회를 열고 믿는 자들에 대한 전략을 수정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어떠한 가르침이든지

예수의 보혈만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다른 것을 이유로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위협하고 두렵게 하고 확신에서 멀

어지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신구약을 관통하지 않은 것이고, 보혈의 가치를 절하하는 것이고, 율법

을 만족시킨 은혜를 간과하는 것이고, 성경의 표면적 명령과 이면적 진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사단과 달리 예수님은 이제 담대히 믿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게 믿느냐.”(요한복음 11:25)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유혹할 때 했던 말을 이제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맥락이 완전히 정반대다. 예수님이 보혈을 흘리시고 율법을 만족시키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에덴동산보다

나은 이유 중 하나는 이제는 새 예루살렘에는 선악과가 없으며 빛나는 생명나무만 있으며, 결코 사단의 유혹으

로 인한 재죽음이 없기 때문이며, 주님과의 친밀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믿는 자들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고린도전서 15장은 믿는 자들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시간을 초월해계신 하나님의 전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죽어도 죽음을 경

험하지 않게 될 것이다. 새로운 영광의 몸을 입고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통

치하는 맛을 누리는 것도 즐겁고 기쁘면서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너희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차명권 전도사(온누리교회, HEART min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