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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희망사항

201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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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사항 / 용우

 

“여보, 내가 당신 서재 하나 만들어줄게.”

식탁에 앉아 글 쓰는 나를 보고 아내가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람, 하고 쳐다보니 표정이 제법 진지하

다. 밥상물린 그 자리에 노트북을 펴 들고 앉은 모습이 처량하게 보였나 보다. 서재를 만들어준다… 말이라도 고

맙네. 나는 그런 뜻으로 빙긋이 웃었다.

내가 웃거나 말거나 아내는 어디에 서재를 만들면 좋을까 궁리하는 얼굴로 손바닥만 한 리빙룸을 빙 둘러본다.

소파를 바라보다가 반대쪽 TV로 시선을 돌리고, 벽에 붙어선 책장으로 눈이 가는 가했더니 급기야는 부엌입구의

김치냉장고를 째려본다.

“여보, 아무리 궁리해봐야 뾰족한 수가 없어, 이 코딱지만한 리빙룸 어디에 서재를 꾸민다고 그래. 나는 이 식탁

만으로도 땡 큐야, 걱정하지 마.”

아내는 식사가 끝난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후식으로 오렌지도 갈라먹고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며

느슨하게 식후의 포만감을 즐기려는 것이다. 그런 아내의 생각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나는 식사가 끝나는 대로

식탁이 치워지기를 원한다. 신문도 봐야 하고 글도 써야 하기에 마음이 급한 때문이다. 그래서 식사가 끝나면 내

앞의 빈 그릇들을 슬슬 가장자리로 밀어낸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내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아이고, 또 저런다, 제발 잠시라도 좀 앉아 있읍시다.” 나도 지지 않는다.

“여보, 벌써 아홉 시가 넘었는데 잡담하고 앉아 있을 새가 어디 있어?”

“잡담? 당신 신문에 코 박고 있는 것보다는 잡담이 더 유익해.”

“이 사람아 내가 어디 신문만 보나, 쓰던 글 마쳐야 하니까 그렇지.” 글 쓴다는 말에 어쩔 수없이 아내는 한 발 물

러선다.

“어휴, 서재가 하나 있어야지 식탁에서 글을 써서야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기나 하겠어.” 이런 실갱이가 하루 이

틀이 아니다. 오죽 딱하면 우리 집 구조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서재궁리를 하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을까.

 그린이 지난해까지만 해도 매거진에디터가 되겠다고 뉴햄프셔의 웨슬레 대학을 꿈꾸어서 아이가 떠나면 그 방

을 서재로 사용하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언젠가 수의사로 전공을 바꿔 UC데이비스를 가겠다더니,

지난달부터는 산부인과 의사가 될까, 간호사가 될까, 하며 UCLA를 거쳐 요즈음은 아예 코앞에 있는 UC얼바인

까지 와버렸다. 가을학기에 11학년이 되는 그린의 전공이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현재로는 아이의 방을

서재로 쓰겠다는 희망도 난망 하게 되었다.

 서재를 말한다면 아내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 나는 밥그릇만 치우면 제법 넓기라도 한데, 우리 침실의 컴퓨터데

스크를 책상으로 쓰는 아내는 사뭇 옹색하다. 컴퓨터스크린 앞의 겨우 한 뼘 공간에 책과 노트와 필기도구들을

늘어놓고 시를 짓는다. 물질적 풍요가 창작의 풍요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글 쓰는 사람에게 있어 사색할 최

소한의 공간은 참으로 필요한 것이다.

아내는 계속해서 골똘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한 쪽은 저렇게 마음을 쓰는데 한 편은 가

만히 있다는 것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떠오른 그림 하나를 불쑥 말했다.

“여보, 나는 당신에게 찻집 하나 차려줄 거야!” 서재에 골몰해 있던 아내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뭘 차려준

다고?” 하고 되물었다.

“찻집을 차려준다고, 찻집! 녹차, 국화차, 둥굴레차, 커피 그런 거 말이야.”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들은 아내는 손뼉을 짝짝짝, 치며 “어머나, 정말이야? 어머, 어머, 그거 너무 좋다, 너무 좋

아!”하며 양 옆으로 몸을 흔들었다.

“당신 잘 만드는 호도쿠키도 팔고, 삼겹살샌드위치도 만들어 팔고, 감자나 고구마도 구워 팔고, 안흥찐빵도 쪄서

팔고 그러면 잘되지 않겠어? 친구들도 오고, 교인들도 찾아올 것이고, 문우들도 놀러 오고, 재미있잖아!” 나는 머

릿속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쏟아 놓았다.

“오, 그래 그래, 당신 아이디어 좋다! 그런 메뉴라면 사람들이 다 좋아하지, 그런데 삼겹살샌드위치는 뭐야? 그런

것도 팔릴까?”

“응, 그냥 막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건데 싫으면 그만두고.”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다 보니 아내가 먹지 않

는 돼지고기도 들어가 버렸다.

“아니야, 괜찮을 것 같은데, 신선하잖아. 한 번 추라이 해보지 뭐.”

“그래? 삼겹살샌드위치도 한 번 추라이 해볼래?”

“응, 그래, 까짓 거 못해볼게 뭐 있어. 오케이 해보자고.”

 거기까지 뒷말 이어가기를 하던 우리는 어느 순간 우 하하, 폭소를 터뜨렸다. 찻집 역시 서재만큼이나 실현 가능

성이 없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찻집을 개업해서 잘된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그런 돈이 있으

면 먼저 조금 큰 집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순리일 터였다. 그래서 나는 서재를 마련하고, 아내에게도 컴퓨터테이

블 곁에 큼지막한 책상을 놓아주는 것이 마땅하리라.

 그런데 당장 급조해낸 말이기는 하지만 찻집 차려준다는 말에 아내가 저렇게 즐거워하는 것을 보며 한순간의

농담으로 흘려버리기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서재와 찻집, 당장은 해법이 보이지 않지만 아주 버리지는 말

고 우리의 소중한 ‘희망사항’으로 고이 간직할 것이다.

 

2013.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