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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특별한 발렌타인데이

201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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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발렌타인데이 / 용우

 

 아빠와 딸이 함께하는 ‘Valentine Tea For Daddy and Daughter’를 앞두고 담당 전도사님으로부터 확인전화가 왔

다.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고 그날 딸에게 읽어줄 편지를 써오라고 했다. 그래서 ‘사랑하는 딸에게…….’ 로 시작

하는 편지 한 장을 썼다.

 -그린아, 요즈음 학기말시험도 보고 숙제도 많고, 또 운동하러 피트니스와 배드민턴 치러가고, 화장도 해야 되

고, 대학은 어디로 가며 전공은 무엇을 선택하나 등등…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고 바쁘지?

 언젠가 너는 ‘라이프가 너무 힘들어’ 그렇게 말했지. 정말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란다. 허지만 그런 어려움을 이

겨내고 나야 행복한 미래가 다가오는 것이지. 지금 힘든 것을 참아내면 미래가 편하고, 지금 편하게 살면 미래가

힘들단다.

 동물을 좋아하는 네가 수의사가 된다면 아빠 엄마가 병원 청소도 하고, 강아지 똥도 치워주고, 목욕시켜주는 일

도 해줄게. 또 결혼해서 가정주부로 산다면 베이비시터도 해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물론 공짜는 아니야.

 대학가는 것이든 사회에 나가 직장을 잡는 일이든 아니면 결혼을 하든지 어는 것에나 겁내지 말고 당당하게 최

선을 다하는 거야. 어떤 길이든 네가 결정하면 아빠는 후원할거야. 너는 지혜롭고 총명하니까 잘해낼 수 있을 거

야. 아빠는 너를 믿어.

그리고 힘들 때면 언제고 아빠에게 달려 오거라, 아빠와 엄마는 항상 포근한 침대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너

를 환영해줄 테니까.-

 대략 이런 내용의 편지 한 장을 써놓고 보니 아무래도 한글보다는 영문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아

아내에게 번역을 부탁했다. 번역을 부탁 받은 아내는 또 나름대로 브로큰잉글리시가 되지 않게 하려고 직장에

있는 미국인 동료에게 감수를 받기까지 했다. 그렇게 번역한 영문편지를 여러 차례 소리 내어 읽었다. 큰 소리로,

그리고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도 읽기 연습을 했다.

-마이 러블리 도럴 그린, 아이 노 댓 유어 비지 앤드 타이어릿 리센틀리. 유 헤브 어 랏스 업 홈웤, 앤드 화이널 테

스트, 고투더 짐, 플레이 배드민턴, 앤드 풋언 메이컵…….-

옆에서 듣던 아내가 ‘리센틀리가 뭐야, 리센틀리가… 스므스하게 리슨리, 이렇게 읽어야지. 다시 해봐, 리센틀리

가 아니고 리슨리, 오케이?’ 하며 핀잔을 주었다. 문학에 대해서는 항상 열세를 면치 못하는 아내가 영어문제로

들어서면 물 만난 잉어처럼 비늘을 세운다. 어쨌든 이번 발렌타인파티에 더욱 존경 받는 아빠로 업그레이드되기

위해 나는 그런 수모를 감수하며 편지 읽기를 연습했다.

 행사 당일인 토요일 오후 2시, 교회본당 로비에 들어서니 딸의 손을 잡은 아빠들이 긴 줄로 늘어서 있었다. 핑크

색 하트문양으로 장식한 ‘LOVE’ 싸인 앞에서 봉사자들이 딸과 아빠의 인증샷을 찍어주고 있었다. 둘러보니 나처

럼 큰 딸과 함께 온 아빠도 있었지만,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같은 어린 딸과 참석한 아빠들이 더 많았다. 어떤 젊

은 아빠는 고만고만한 딸 둘을 데리고 온 사람도 있었다.

 사진촬영을 마치고 행사장인 비전 홀로 입장했다. 이름표를 가슴에 붙이고 지정된 좌석을 찾아 앉았다. 하얀 테

이블보가 씌워진 사각형의 탁자 위에는 돛단배 모양의 이름표와 함께 쿠키와 캔디, 하트모양의 백설기 떡이 놓

여 있었고 투명한 유리컵 캔들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 사회자가 나와 이번 행사의 취지와 함께 두 시간 동안의 일정을 설명하고 순서를 진행

했다. 첫 순서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딸과 아빠에게 게임을 시켰다. 사회자의 신호에 따라 바닥에 놓인 종이를

집어 재빨리 상대의 몸에 붙이는 게임인데,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머리를 고무밴드로 예쁘게 묶는 것이었다.

 머리 묶기 게임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그 열기를 식히기 위해 미리 제작된 영상물을 보여주었다. 이번 행사

에 참석한 모든 아이들이 출연하여 아빠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린이도 얼굴을 빨갛게 물들

이고 연신 킥킥거리며 ‘데디, 아이 러브 유’를 외쳤다. 다음 순서로는 아빠와 딸이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

는 시간으로, 각각 8 가지의 질문사항이 프린트된 인쇄물을 나누어 주었다. 먼저 내가 그린에게 질문을 시작했

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니? / 친구들과 텍스트 메시지 할 때.

-가장 슬플 때는? /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서로 싸울 때.

-가장 화가 날 때는 언제? / 게임(경쟁)에서 졌을 때.

-하루만 투명인간이 된다면 어떻게 할래? / 저스틴 비버에게 갈래.

-너는 너 자신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니? / 너무 걱정을 많이 하지 말라고.

-네가 어렸을 때 기억나는 것은? / 엄마가 아파서 쓰러졌을 때 911 전화해서 앰블런스가

와서 구조대원들이 집으로 들어왔을 때.

-아빠가 고쳐야 할 점 한 가지는? / 내가 친구네 집에 가서 자는 것을 허락해 주는 것.

-장래 희망,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 에니멀 닥터.

다음으로 그린이 나에게 질문하는 순서였는데, 위의 질문과 중복되는 항목이 서너 개 있고, 다른 것은 [내가 태어

났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아빠가 내 나이였을 때 꿈은?/ 아빤 내가 언제 자랑스러운가?/아빠랑 엄마랑 어떻게

만났나?] 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검사 앞의 피의자처럼 정직하게 답변했다.

 다음 순서로 드디어 딸에게 편지 읽어주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편지를

읽었다. 네가 만약 동물닥터가 되면 아빠가 병원 청소도 해주고, 동물들 똥도 치워줄게, 하는 대목에서 슬쩍 그린

을 쳐다보니 싱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전에 서로 궁금한 것을 묻는 장면에서 장래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린이 에니멀 닥터가 되겠다고 답했는데, 우연찮게도 딸에게 주는 편지에 내가 그런 내용을 써서 마음

이 통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끝으로 편지 말미에 ‘언제고 힘들면 아빠에게로 달려오렴.’ 하는 -Whenever your are tired, exhausted and in a

tough situation, run to me, I will wait for you and comfort you.-를 읽으며 다시 한 번 그린을 쳐다보니 몹시 흡족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이 러브 유 쏘머치, 해피 발렌타인!’ 하며 읽기를 마쳤더니, 그린이 정말 존경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아

빠, 땡큐~우.’ 했다. 성공이었다. 아내가 주문한 ‘리슨리’를 깜빡 잊고 이번에도 그만 ‘리센틀리’로 읽고 말았지만

그것이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특별한 발렌타인데이 행사가 아주 만족하게 성사되었다.

 

2013.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