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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추수감사절여행

201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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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여행 / 이 용우

 

 지난 8월에 돌아가신 장모님 장례식을 치른 후 처가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머니 병구완과 이어진 장례식

으로 경황없던 형제들이 서로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하는 자리였다.

그 동안 장례식에 관한 모든 재정을 관리했던 막내처남이 3만여 불에 달하는 장례비용을 치르고도 8천 불 정도

가 남았다는 결산보고를 했다.

 잠시 의논 끝에 한인재소자 갱생을 위해 교도소사역을 하는 모선교회에 3천불을 한국 친척에게 1천불을 후원하

기로 하고, 나머지 4천불로 모든 식구들이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여행지로는 온천 물에 피로를 풀자는 여성들의 의견에 따라 팜스프링으로 정했다. 여행 시기는 추수감사절연휴

로 했다. 인원점검을 했더니 3남 3녀의 처가 형제들 중 이미 중남미로 여행계획이 잡혀 있던 샌디에고의 큰처남

네를 제외하고 총 16명이었다.

 얼마 후 막내처남(우리 처갓집은 이 막내처남이 모든 대소사를 총괄하는 지휘자이다)으로부터 자세한 여행 일

정이 이메일로 도착했다. 추수감사절 전날인 수요일에 체크인하여 금요일에 돌아오는 2박 3일의 일정이었다. 도

착 당일은 저녁식사를 마치면 온천이나 찜질 방에서 피로를 풀며 자유 시간을 갖는다. 둘째 날 조식 후에는 샌하

신토마운틴으로 케이블카를 타러 가며, 저녁에는 컨퍼런스룸에서 게임을 한다. 마지막 금요일은 아침 먹고 출발

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롱고카지노 옆에 있는 카바존아울렛에 들르는 것으로 모든 여행 일정이 끝난다는

내용이었다. 여행기간 동안 아침 저녁식사는 준비해간 식 재료로 호텔에서 직접 조리해 먹고, 점심은 밖에서 해

결한다며 이에 따른 각 가정의 준비물들과 함께, 많은 선물도 준비되었으니 기대하시라고 적혀있었다.

 정해진 날짜가 다가오는 어느 날 문득 아르헨티나에서 유학 온 친구의 딸 효지가 생각났다. 그 아이를 남겨둔 채

우리만 여행을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효지도 팜스프링 여행에 데리고 가야지?” 내 말에 아내도 잠시 생각하더니,

“그래, 효지 생각을 못했네, 당연히 데리고 가야지.”

“여행경비를 공동기금으로 사용하는데 다른 형제들이 좋아할까? 아니면 효지 경비는 우리가 내지 뭐.”

“아니야, 우리 집 행사에 효지를 두어 번 데려갔었잖아, 언니나 동생들 모두 잘 알고 있으니까 이해할거야, 슬기

랑 새롬이 또 인표나 한별이도 다들 알잖아, 걱정하지 마. 호텔 방에 더블베드가 두 개 있다니까 그린이와 같이

침대를 사용하면 돼.”

“잠자리나 모텔에서 먹는 것은 그렇다지만 케이블카 탈 때, 밖에서 식사할 때 같은 경우는 별도의 비용이 들잖

아.”

“아유, 괜찮아, 내 형제들이 그 정도로 쪼잔한 사람들은 아니야. 오히려 감사의 계절에 외로운 아이를 도와주게

되어 기쁘게 생각할거야.”

“오케이, 그럼 효지에게 전화해서 같이 가자고 해.”

그렇게 해서 효지도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큰 처형 네가 우리 미니밴에 편승하기로 하여 식재료와 함께 여

섯 사람을 가득 태우고 팜스프링으로 출발했다.

57번 북쪽으로 가다가 10번 동쪽을 타려고 했는데 대화에 정신을 팔다가 그만 60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어쩔

수없이 15번 북쪽을 한 번 더 갈아탄 후에야 10번 동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오후 3시 30분에 얼바인에서 출발

했는데, 그날 트레픽까지 몹시 심해서 우리가 팜스프링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였다.

 우리 그룹 중에 가장 먼저 도착한 팀은 오후 2시에 체크인한 둘째 처남 네였는데, 이 사람이 배고픈 것을 못 참

는 위인이었다. 오는 도중 이미 프리웨이 상에서 두어 차례 독촉전화를 받았는데, 우스운 것은 서로가 맡은 준비

품목이었다. 둘째 처남 네는 나무젓가락, 종이접시, 네프킨따위 일회용 써플라이를, 늦게 간 우리는 쌀과 양념갈

비, 각종반찬에 스넥까지 모든 먹거리를 도맡아 실은 것이다. 이 준비물만 서로 바뀌었더라도 좀 덜 미안했을 것

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바삐 짐을 내렸는데, 야외 바비큐시설이 있는 호텔뒤쪽 피크닠에리어의 쓸 만한 자리는 이미 먼

저 온 사람들이 차지하고 없었다. 우리는 한쪽에 쌓여있던 간이테이블을 펴서 세우고 먼지를 닦아 식탁을 만들

었다. 한쪽에서는 쌀을 씻어 밥을 짓고, 몇 사람은 전기프라이팬에 고기를 구웠다.

 피크닠에리어 중앙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식사를 하던 그룹에서 돼지갈비를 한 접시 가지고 왔다. 아내

가 온누리교회 2부 성가대에서 함께 활동하는 교우라고 소개해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해서 좀 늦은 저녁이

었지만 우리는 모두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은 수영장으로 어른들은 온천과 찜질방으로 흩어져갔다. 원래

붙임성이 좋은 효지도 스스럼없이 아이들에 섞여 수영장으로 향했다. 나는 직장에서 반나절 일하고 돌아와 서둘

러 여행길에 오른 피로감으로 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잠을 깬 나는 서둘러 피크닠에리어로 갔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

다. 7시가 채 안된 시간이었지만 한 사람도 안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아하, 하고 무릎을 쳤

다. 관광지에 와서 느긋이 쉬지 못하고 이렇게 조바심을 하다니, 이건 필시 늙었다는 싸인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

던 것이다. 물론 그 늙은 생각덕분에 그날 모든 식구들은 여유롭고 우아한 아침식사를 즐겼다.

 십여 년 전에 한 번 다녀간 적이 있는 샌하신토마운틴의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은 기억에 남아있는 대로 경사

가 심했다. 그때, 기능이 쇠한 볼보를 끌고 왔다가 과열된 엔진에 불이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

다. 이번에는 연식이 오래되지 않은 미니밴인데도 사람을 가득 태워서 그런지 힘겹게 경사 길을 올라 주차장에

당도했을 때 기름 타는 냄새가 심하게 났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에 올라 어드벤쳐스테이숀이 있는 계곡을 내려다보니 꼬불꼬불한 트레일을 따라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십여 년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잘도 걸어 내려가 그때까지 녹지 않고 음지에 숨어 있는 눈

덩이를 만져보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 아래까지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당신은 힘들어서 않되, 그냥 여기 앉아서 자연경관이나 감상해.”

눈치 빠른 아내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알았어,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그냥 말기는 서운해서 슬슬 걸어

내려 갔다. 아내가 한쪽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어 부축을 했다. 그렇게 꼬부랑 트레일을 두어 구비를 돌았는데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일 갓길에 설치된 돌 의자에 앉았다. 처남들을 비롯한 아이들은 이미 몇

구비를 돌아 저만치 아랫길을 가물가물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번 추수감사절 여행 중 가장 유쾌하고 즐거웠던 시간은 둘째 날 저녁이었다. 한쪽 벽면을 통째 아름다운 풍경

화로 채운 아담한 컨퍼런스 룸에서 각종 게임으로 경쟁을 펼치는 놀이였다. 아이들과 어른들을 반반씩 섞어 청,

백, 두 팀 8명씩으로 나뉘어 대결을 시켰다.

 게임의 성격에 따라 영어권인 아이들에게 유리한 것이 있는가 하면, 어른들에게는 쉬운데 아이들은 무슨 말인

지 몰라 눈알만 굴리는 문제가 비일비재였다. 그 중 가장 포복절도한 놀이는 한 팀 전체를 일렬로 세워 벽을 향해

돌아서게 한 후, 맨 뒤의 사람에게 속담 하나를 글씨로 보여주고, 그것을 바로 앞 사람에게 몸짓으로 전달하게 하

여, 한 팀 8명이 모두 그 몸짓표현방식을 거쳐 마지막으로 제일 앞쪽에 선 사람이 정답을 맞히는 놀이였다. 물론

그 속담놀이의 선두와 후미에는 당연히 어른이 자리했지만, 그 중간에 한국 속담을 전혀 모르는 2세 아이들이 끼

어 있으므로 하여 끝에 가서는 완전히 코메디 같은 장면이 연출되고 마는 것이었다.

 이렇게 유쾌한 시간이 지나고 형제들 가정마다 커다란 선물보따리가 두 개씩 안겨졌다. 이로 인해 음식을 먹어

치우면 차안에 여유 공간이 생기려니 했던 기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귀향 길의 좌석은 더욱 좁아지고 옹색해져

버렸다.

 그런 형편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팜스프링 다운타운으로 달려가, 멀리 시카고로부터 옮겨온 문

제의 마릴린몬로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은 모두 마릴린몬로 동상의 한쪽 다리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는데, 아무리 키가 큰 미국인도 그 다리의 정강이에 미치지 못했다.

 처음 계획대로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카바존 아웃렛에 들러 쇼핑을 했는데, 그 날이 바로 블렉프라이데이여서

주차하는데 만도 한 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고생이 막심했다. 물론 여성들은 일찍 내려주고 나 혼자 주차장을 뺑

뻉 돌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동서 형님이 점심을 낸다고 하여 모롱고카지노 안에 있는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 다르게 큰 교통체증 없이 수월하게 뚫렸다. 컬버와 얼바인블러버드에 있는 처형 네 집에 들러 형님네를 내

려주고 우리 집으로 왔다.

 우리 집 앞길에 차를 주차해두었던 효지는 바로 집으로 가겠다며 인사를 했다. 이번 여행이 즐거웠느냐고 물었

더니, 아주 재미있고 정말 즐거웠다며 여행에 데려가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효지가 떠나고 우리 식구

만 집으로 들어서는데 아내가 말했다.

“효지가 말이야, 어제 저녁에 자기 여행경비로 쓰라며 백 불짜리 한 장을 내밀지 않았겠어, 그래서 내가 얘, 그만

둬, 네가 이번 여행에 함께한 것을 우리 형제들이 모두 기쁘게 받아들였어, 너는 그냥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해주었지.”

“ 그러고 보니 처가 식구들에게 효지 끼어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안했네, 모두들 워낙 자연스럽게 받아주어서 그

럴 필요성 마저 느끼지 못했나봐. 효지도 그만 식구처럼 편하게 지냈잖아.”

“ 그럼, 그랬지. 호호호, 그런데 말이야 여보, 고 깜찍한 것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아줌마, 그러면 제가 아줌마 언

니들에게 외식 한번 살게요, 내가 쏘겠다고요.’ 뭔지 몰라도 지가쏘겠데,그래서 내가 얘, 쏘긴 뭘쏴, 하며 등짝을

탁 때렸어.귀엽지?”

우리는 유쾌하게 깔깔깔, 껄껄껄 웃었다.

 

2012.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