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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늦지 않았어

201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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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지 않았어 / 이 용우

 

 저녁을 먹는데 그린이가 다른 반찬은 버려두고 깍두기만 먹고 있다. 제 밥그릇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반찬은 쳐

다보지도 않고 코앞에 있는 깍두기만 집어 먹는다. 가만히 보니까 무슨 생각에 정신이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린아, 반찬을 골고루 먹어야지, 깍두기만 먹지 말고.” 내 말에 그린이 히잉, 하며 밥숱갈을 놓는다.

“아빠, 무서워.”

“무서워? 뭐가?”

“쪼끔 있으면 ACT score 나올 거야.”

“에이씨티 스코어? 그거 메일로 온다고 했잖아, 그런데 조금 있다가 어디서 나온다는 거야, 인터넷에서?” 내 말

에 그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Yes, ten o’ clock 에 나올 거야, 무서워.” 하며 어깨를 움츠린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렇다면 긴장할 만 하지, 라

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하지 마, 너 그동안 공부 열심히 했으니까 좋은 점수 나올 거야. 그런데 네가 원하는 점수는 얼마야? 몇

점 받았으면 좋겠어?” 내 말에 그린은 입술을 쑥 빼물고 움츠린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뜸을 들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답답했던지,

“말해봐, 몇 점 받았으면 좋겠어? 이천 점? 이천이백 점? 아니면 이천사백 점? 그건 만점인데 설마 만점 받기를

원하는 건 아니겠지?” 하며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린이 벌떡 허리를 펴며 목청을 높였다.

“Act는 이천 점 그런 거 아니야, ACT는 high score가 36 point야.”

그린의 핀잔에 아내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오우, 에이씨티 점수는 그렇게 매기는구나, 하며 우리의 무지에 얼

굴을 붉혔다. 그동안 아이가 대입평가시험을 SAT가 아닌 ACT를 본다고 하여 자신 있는 쪽을 택하라고 격려만

했었다. 점수는 SAT나 ACT가 으레 같은 방식이려니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우, 알았어, 쏘리, 쏘리, 그래 우리 따님의 골은 몇 포인트인가요?” 멋쩍어진 아내가 짐짓 애교를 부리며 아이

의 어깨를 감싸자 그린이 배시시 웃으며,

“Over thirty.” 했다. 그러며 그린은 Act 30점은 SAT 2000점과 같은 레벨이라며, 과외학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친

구 미셀이 지난 시험에서 33점을 받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린을 학원문턱에도 보내지 않았다. 그린이 자신도

학원이라는 곳을 가기 싫어했지만, 나도 아내도 학교공부면 됐지 무슨 학원씩이나, 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물

론 그린이 제가 잘 알아서 공부하니까 믿는 마음이 있어서였지만, 학교공부만으로도 힘든 아이들을 학원으로까

지 내모는 짓을 나만큼은 하지 않겠다는 평소의 지론에서였다. 사회적 지위나 풍요를 소유하기 보다는 좋은 인

성의 소유자로 키우고 싶다는 것이 변함없는 소망이다.

“삼십 점에서 삼십 이점 사이 받으면 좋겠니?” 내가 물었더니 그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I Wish.” 했다.

“알았어, 아빠가 기도할게.” 나는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는데 그린이 픽, 웃었다.

“아빠, too late이야, 벌써test 끝났는데 기도해도 똑같지.”

“그린아, 그렇지 않아, 사람의 생각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야. 기도는 알게 되는 순간까지 하는 거야.”

“아빠, 기도하면 내가 wrong Answer한 게 right answer로 change  돼.”

“아니, 그렇지만 점수는 네가 원하는 것을 받을 수도 있어, 기도는 늦은 때가 없어.” 그래도 그린은 괜한 말이라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 했다. 그러는 아이 모습에 은근히 부아가 올랐다.

“그럼 아빠가 기도하지 말까? 너 이십팔 점이나 이십구 점 받아도 괜찮아?” 나는 그린과 얘기하는 동안 그 정도

가 자신이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점수라는 것을 간파하고 허를 찔렀다. 생각대로 그린은 당장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나는 못 본 척 했다.

“OK, if you want, you can do it.” 믿지 못하겠지만 기도는 해달라는 소리였다. 나는 얼른 아이의 손을 잡으며 등

을 쓸었다.

“그래, 아빠가 기도할게 걱정하지 마. 우리 딸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까짓 삼십 점 이상을 못 받겠어, 그

렇지?” 그제야 그린은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활짝 웃었다.

밥상을 물린 후, 그린은 제 방으로 올라가고 우리도 뒤따라 올라가 샤워를 하고 잠자리를 폈다. 시간을 보니 아홉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내는 이메일을 보고, 나는 침대에 누워 M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며 기다렸다. 겉으로는 책을 읽고, 속으로는 기

도했다. 그런데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아이에게 큰소리 쳐놓고 점수가 나쁘게 나오면 어쩌나 근심이 될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마음이 편안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도를 멈추고 독서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와아! 하는 괴성이 들려왔다. 직감적으로 ACT 점수가 나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린이 제방으로부터 쿵쿵거리며 뛰어 왔다.

“Oh my God, 이거가 꿈이야 생시야?” 그린은 제 엄마가 하듯이 손으로 자기 볼떼기를 쥐어흔들며 환성을 질렀

다. 기대하던 점수가 나왔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몇 점이야?”

아내와 나는 동시에 물었다. 그린은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춤을 추며 말했다.

“Thirty two! 삼십 이점! Oh, yes!”

“야아, 우리 딸 잘했다, 정말 잘했어, 축하 한다, 축하해!”

우리는 셋이 함께 껴안고 기뻐했다. 그때 그린이 말했다.

“아빠, 그런데 essay 점수는 안 나왔어,Essay는tomorrow에 나와.”

“그래? 에세이는 몇 점 받아야 되는데?”

“응, essay는 high score가 twelve인데 over ten 받으면 돼.”

“그래? 십 점 이상 받으면 된단 말이지, 알았어, 아빠가 또 기도할게, 오케이?”

“OK, I trust your prayer.”

그린이 이번에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Jan. 13,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