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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권의 영혼의창-저쪽을 겨냥한 칼날

201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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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을 겨냥한 칼날

 

분하고 원통하다.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작고 힘없는 이웃의 소중한 가치를 빼앗아 가다니. 다윗은 분노하며 이

일을 행한 자는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선지자 나단에게 소리쳤다. 여호와께 맹세까지 하며 말이다.

한 성읍에 가난한 한 사람과 부자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부자가 자기의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

금쪽같이 여기며 의지해 살아가던 하나 밖에 없는 암양 새끼 한 마리를 강취했다. 그 부자의 범죄혐의를 나단에

게서 들은 직후였다.

우리들은 늘 다른 사람의 이런 범죄혐의를 듣는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며 소리를 높이

고 손가락을 치켜들고 서로 모인다. 제소한다. 정의와 공정의 칼은 언제나 밖을 향했다. 우리는 그 칼의 그림자

안에 숨는다. 그리고 들키면 안 되는 무언가를 감춘다.

이 일을 행한 자는 마땅히 죽여야 한다는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은 그 범죄의 주인공이 바로 당신이라고 밝혀준

다. 밖을 향했던 정의와 공정의 칼이 방향을 바꾸어 다윗을 겨냥했다. 다윗은 이내 자신이 벌거벗은 자처럼 완전

한 사망 아래 놓여 있는 처지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윗 스스로는 빠져나갈 출구가 없다. 남의 잘잘못을 들춰내

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다윗에겐 사치에 불과해버렸다. 내 들보가 보인 것이다.

사무엘하 12장의 이 말씀은 로마서 1장과 연결된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기 전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야기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가 얼마나 잘 살아왔는데. 빗나가지 않게 살았고, 이웃을 돕고, 사회적으로 존경 받으며 살

아 왔는데.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않냐고.

하지만 바울은 모든 인류를 예외 없이 사망 아래 가둬버린다. 아무도 벗어날 자가 없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

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

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9-32)

이 말씀은 읽는 자로 하여금 아,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어. 음,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어, 라고 마음을 먹게 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이럴 수가, 나에게도 사형선고가 떨어졌구나, 라고 전적인 어두움을 깨달으라고 기록

한 것이다. 나의 외부로부터 전적인 은혜로 구원자가 오셔야 하는구나, 깨달으라고 기록한 것이다.

모든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며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나은 척 하면 살았던 다윗이 자기의 어두움을 깨닫고 지

은 시가 시편 51편이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0)

빼앗긴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정의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를 휩쓸고 갈 때, 우리 스스로가 늘 약한 자의 것을 빼앗

으며 살아온 강도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칼 아래에 숨어 편승한다면 복음은 자유와 안식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이제 절망적인 다윗의 고백은 예수님으로 인해 기쁜 소식으로 전환되었다. 다윗은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

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7-8)라며 예수

님의 때를 기다렸고, 우리 믿는 자들은 보혈 때문에 이 은혜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거대한 칼날이 등장하여 누군가를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우리의 열등

감과 상실감을 보상 받으려고 작동하기 시작할 때, 믿지 않는 자들은 스스로가 그 칼끝에 서 있음을, 믿는 자들은

스스로가 그 칼끝에 서 있었음을 결코 잊지 않는 사랑과 용서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대의 연주는 계속된다.

 

/차명권 목사(온누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