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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 – 41년 만에

201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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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만에/ 홍순복

 

 뉴욕 선배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우리 부부를 중매한 뉴저지 K선생님 댁으로 향했다. 선배는 택시를 타려는 우리를 데려다 준다고 했다. 자신도 바람 좀 쐬고 싶다고 했다.풀러싱을 벗어난 고속도로는 여러 길로 갈라져 복잡하게 보였다. 뉴저지로 들어서자 뉴욕과는 사뭇 다르게 한적해 보였다.쉽게 찾은 3층 건물 아파트로 들어섰다. 전화를 하니 선생님은 금세 밖으로 나오셨다. 여고 때의 뵙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내린 듯 착각을 했다.어서들 와요, 하며 주차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선생님은 왔어요, 소리쳤다. 더운 날에 화장을 곱게 한 사모님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전화와 편지로만 연락하다 만나니 꿈만 같다며 좋아하셨다.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우선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은 올해 81세인데 주름하나 없이 배만 약간 나왔다. 체크무늬셔츠와 반바지를 입었고 앞머리는 휑하니 달아났다. 모습은 예전이나 다름없이 도회적으로 보였다. 사모님은 여고 때 선생님을 아직도 기억하고 연락하는 제자가 누군지 보고 싶었다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작은 거실엔 가족사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깔끔하게 정돈이 잘 되어있다. 얼마 전까지 사모님은 맨해튼에 있는 아들네 일식당 주방에서 일하셨는데 다리가 아파 수술 하고 이제는 쉰다고 했다. 선생님은 고생하는 아내에게 미안해 청소와 장보기를 담당한다고 했다.

 선생님은 바삐 방으로 들어가더니 당신 사진 두 장을 들고 나와 내게 보이며 어떤 얼굴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저 얼굴이요, 하며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칼라사진을 가리키니 내가 떠난 후 찍은 사진이라 했다.하얀 접시로 차려진 밥상엔 파를 잘게 찢어낸 파 무침, 동그랗고 예쁜 버섯 전, 새우부침 , 손수 담근 배추김치 그리고 불고기였다. 간이 잘 밴 음식 때문에 우린 어느 때보다도 많이 먹었다. 사태로 국물을 낸 물냉면도 별미였다.상을 물린 후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모님은 남편 이야기를 제자에게 한다고 먼저 선생님에게 선포했다.

-글쎄 말이야, 둘째 아들을 낳은 몹시 추운 겨울이었어. 방에 연탄난로를 피웠는데 어느 날 연탄가스 냄새가 나는 거야. 연통 안이 막혀서 그런 거야. 저이에게 나가서 연통을 두드리라고 했지. 그런데 저이는 큰애를 불러 장갑을 가져와라, 모자를 가져와라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거야. 한참을 기다려도 방에 들어오질 않기에 우는 아이를 업고 밖을 나가니 저이가 연통을 째려보고 있는 서있는 거야. 뭐하느냐고 소리쳤더니 어디를 어떻게 해야 하나 연구 중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얼른 연통을 세게 쳤어. 그랬더니 당장에 막힌 곳이 뻥 뚫렸어. –

 연통을 째려본다는 장면에서 사모님은 벌떡 일어나더니 선생님이 했던 모양을 과장해서 재연해 보이며 재미있게 흉내를 내었다. 우리는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그러자 사모님은 신바람이 나서 또 한 번 째려보는 흉내를 냈다. 그래도 선생님은 허허 웃기만 했다.시인인 남편은 오로지 꽃, 하늘, 나무 같은 시밖에 쓰지 못한다고 했다. 생긴 모습과 다르게 글은 여자 같다고 했다.사모님은 식탁에 놓인 냅킨을 흩뜨려 놓으며 이렇게 선생님은 무어든 사용한 후엔 제자리에 놓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어디쯤에 무엇이 있는지 목록별로 다 해놓고 살아. 그래서 누군가를 시킬 때도 쉽게 찾도록 정리정돈을 잘했어. 근데 저이는 가르쳐줘도 그 자리에서 빙빙 돌고 찾지를 못해요.. 아휴,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한 번은 다 망해서 셋방으로 이사를 가야하는데 자기 할아버지가 물려주었다는 작은 책상만 들고 왔다 갔다 하며 짐 하나 싸지 못하고 있어. 그때부터 이사할 때면 거치적거리지 말고 집을 나가라고 했지. 그랬더니 이사한 날 저녁에 새집으로 들어오는데 반짝반짝 구두코가 먼저 대문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오는 거야. 본인도 이게 우리 집인지 살피느라 그랬다는 거야. 그때는 내가 철없어 학교도 졸업 못하고 결혼을 했지. . 내가 왜 그렇게 철이 없었는지 몰라.―

 그때 선생님이 사모님의 말을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난 공부하는 게 싫었어. 매일 놀기만 하고 깡패노릇이나 했지. 우리 친구가 H 학교 애들한테 맞으면 내가 가서 패주었어. 그때 난 힘이 좋았어. 허허, 저 사람과는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 살았어. 장인어른이 I 신문사 사장이었지. 제제소도 하고 부자였어. 아들 둘에 딸 하나로 귀하게 컸어. 우린 8남매였고 아버지가 사업을 실패해 아주 가난했어. –

 8남매란 말에 사모님이 말을 받았다.

 -저 이 집식구들은 밥을 먹는데 양은그릇 긁는 소리가 달가닥 달가닥 요란했어. 아이나 어른이나 고봉밥을 다 먹는 걸 보며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신기했고 좋아보였어. 그런 마음이 내 인생을 바꿀지 꿈에도 몰랐어.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저이와 결혼한다니까 아버지가 3일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누우셨어. ―

 사모님의 말에 선생님은 여유 있게 웃기만 했다.

시간이 자꾸 갔다. 선생님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선생님은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옷매무새를 만지고 나왔다. 멋쟁이 선생님이시다. 학교 때 선생님은 지리 선생님이었다. 늘 읽을 책을 손에 들고 다니셨다. 이국적인 마스크라 아버지가 미국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학교 도서관의 모든 문학책은 다 섭렵하고 읽을 것이 없어 다른 학교로 책을 대여하러 갈 정도로 독서광이었고 지적이었다.우린 서둘러 카메라 앞에서 섰다. 이 순간도 과거가 되리라. 언제 또 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졌다.집으로 돌아오는 기내에서 남편은 말했다. 내가 사모님과 부엌에서 이야기하는 동안 선생님이 자기를 부르더니 손을 꼭 잡고 당부하셨단다. 저렇게 어린 딸도 잘 키워주니 얼마나 좋은가, 더 잘해주고 행복하게 살게, 라고 하셨단다. 친정아버지 같은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이 가슴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