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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칼럼

누가 웃사를 죽였을까?

202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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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6:7]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법궤(언약궤)는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 20년간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이후 성대하게 법궤 반환식을 거행합니다.

다윗은 군사 3만명을 모집하였고 법궤를 운반할 새 수레를 준비했습니다.

오랫동안 법궤를 모셨던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도 반환식에 참여했습니다. 

소가 모는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입장하던 중

타작마당에서 소가 날뛰기 시작하는 급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소의 등에 있던 법궤가 흔들리자 웃사는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웃사의 손이 법궤에 닿자 그 즉시 죽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웃사가 잘못했고 하나님이 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사람들은 웃사 죽음의

귀책사유는 웃사에게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법궤 이동시 주의 사항은 이미 출애굽기부터

수없이 고지(Notice)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이 지도자들은 법궤의 운반 방법을

모를 수가 없고 몰라서는 안될 만큼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족속들의 방식인 소의 등에 얹어 법궤를 이동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속에 소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을 정도인

하나님께는 심히 불쾌한 것이었습니다. 

군인 3만명, 오케스트라, 군복입은 다윗은 마치

전쟁을 마치고 전리품을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법궤는 사람이 메어야 하지만 사람의 손이 닿아서는 안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사람이고 사역을 하는 것도 사람이지만

내가 하나님이 되면 안되듯

결국 사람의 손이 닿지 않으면서 사람이 메어야 할 법궤는

스스로 소의 등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소는 법궤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법궤에 손을 댔기에 죽어야만 했던

웃사의 죽음은 그의 잘못이 아니어야 합니다.

법궤에 손이 닿는 순간 누구든지 죽어야 했고

그것이 법궤의 거룩을 지키는 힘이었기에

결국 웃사를 죽게한 장본인은

그 모든 규정을 준수하지 않았던(순종하지 않았던)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사울로 인해 상처받은) 

하나님의 마음을 치유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하나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법궤 반환식은(예배는, 사역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방지고 못된 자기만의 방식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교회, 가정, 사역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조작하고 조종하는 것은 더 위험합니다.

법궤는 사울의 재임 기간 동안 머물곳을 찾지 못해

스스로 떠돌아 다니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불순종의 대명사

사울과 같이 있을 수가 없었기 떄문입니다.

다윗이 말씀의 규례대로 하지 않고

법궤를  소의 등에 얹을 때 법궤는 수레를 떠나고 싶어하셨습니다.

(소가 날뛸 수 밖에 없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법궤는 다시 한번 그런 취급을 받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윗은 군복을 벗고 제사장의 베옷으로 갈아입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집사도, 권사, 장로도, 목사도 사장도 필요치 않습니다.

모두 예배자로 서 있을 뿐입니다.

다윗이 겸손의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나서야

법궤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 얼마나 오래 되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대 째 가문이냐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법궤를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머무시도록 겸손과 정직의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여러분의 법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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