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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봄나들이

2014.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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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들이 / 용우

 

 차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던 나는 깜짝 놀랐다. 쓰레기장의 시멘트 담장 위에 웅크려 앉은 라쿤과 마주친 것이

다. 무심히 앞만 보고 걷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팔을 뻗으면 닿을 만 한 거리에 눈자위가 새카만

놈이 내려다보고 있어서 적잖이 놀랐다.

 이 놈!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들린 도시락가방을 치켜 올렸다. 그제야 라쿤이란 놈은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고 보니 안면이 있는 놈이었다. 바로 지난겨울에 우리 집 다락방에서 쫓겨난 녀석이다. 사람과 마주쳐

도 겁내지 않고 오목한 눈으로 빤히 내려다보며 맞대 거리 하는 폼이 분명 그 놈이었다. 그때 함께 데리고 사라진

새끼들은 독립을 시켰는지 어쨌는지, 지금은 저 혼자 어슬렁거리고 있다. 어느 허술한 지붕아래 둥지를 틀고 있

다가 날씨가 풀리니까 봄나들이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사람 세상에 사느라 고생이 많았는지 그때보다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전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 놈이 여유작작하게 제 새끼들을 데리고 다락방을 빠져나가던 장면이 떠올랐

다. 그 날은 공교롭게도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이었다. 화장실 천정에서 예사롭지 않은 소음이 들려 다락

문을 열었더니, 새끼를 3마리나 거느린 라쿤이란 놈이 한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질 않아 두

어 블록 떨어진 곳에 사는 형님(손위동서)을 급히 불러서 어렵사리 좆아내고 아예 철망을 쳐버렸다. 그 이후로 다

락방은 고요를 찾았지만, 비록 동물이라도 비 오는 밤에 쫓아낸 것이 마음에 남아 가끔 생각이 나곤 했다.

놈은 쓰레기 컨테이너가 놓인 ‘ㄷ’자 시멘트담장을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 돌았다. 그런 중에도 힐끗힐끗 내 쪽을

살피며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눈매가 매서웠다. 분명 녀석도 내가 자기들을 쫓아낸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산으로 가! 여기 살지 말고 산으로 가!- 나는 다시 한 번 도시락가방을 치켜들며 그렇게 말했다. 내 말을 알아들

었는지 어쨌는지 라쿤이란 놈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나는 카폿 담장위로 어슬렁어슬렁 멀어져 가는 놈을 한

참이나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집 앞 개울의 목조다리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오리가족을 만났다. 머리는 새카맣고 날개는 검푸른 수놈과 까

투리 비슷한 회색의 청둥오리 한 쌍이 올망졸망한 새끼들을 거느리고 물에서 막 올라오는 중이었다. 물길을 따

라 헤엄치던 오리들은 다리를 만나면 언제나 그렇게 헤엄치던 물에서 나와 뒤뚱 걸음으로 보도를 가로질러 다리

반대쪽으로 내려가곤 한다. 다리 밑에 오리가 통과하지 못할 어떤 장애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오리가

족이 놀라지 않도록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하나 둘 셋, 나는 어미 뒤를 따르는 새끼오리의 숫자를 세다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깜짝 놀랐다. 어제

까지만 해도 분명 네 마리였는데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세 마리뿐이었다. 가슴이 철렁, 했다. 혹시 뒤쳐져서 따라

오나 하고 목을 빼보았다. 없었다. 큰 오리 두 마리와 새끼 세 마리가 오종종 거리며 다리 반대쪽 개울로 퐁퐁 뛰

어들도록 지켜보았지만 사라진 새끼오리 한 마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두어 주 전, 청둥오리 한 쌍이 솜털 보송송한 새끼들을 거느리고 인공폭포 앞에 떠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나

는 오우! 하고 탄성을 질렀다. 일 년여 전에도 부화한 새끼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오리가족을 본적이 있지만, 그런

모습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누구라도 아이 주먹만 한 새끼오리들이 제 어미 곁을 뱅뱅 돌며 앙증맞게 물질 하

는 모습을 본다면 탄성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얼른 새끼오리의 숫자부터 세어 보았다. 다섯 마리였

다.

 그랬다. 처음 오리가족을 만났을 때의 새끼오리 수는 다섯 마리였다. 그랬던 것이 한 주간쯤 지난 어느 날 보니

네 마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한 주가 지난 오늘은 한 마리가 더 줄어 이제 세 마리가 남았다. 물

위에서는 동동동, 물 밖에서는 종종걸음으로 어미를 좆던 오리새끼가 며칠 사이에 두 마리나 실종되어버렸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방금 전에 본 라쿤이었다. 사라진 오리새끼들을 그 놈이 잡아먹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무슨 계시처럼 한 순간에 그런 생각이 자리 잡자 라쿤이 오리새끼를 잡아먹었다는 확신이 눈으로

본 듯이 믿어졌다.

 이곳은 LA처럼 집 없는 개들이 거리를 방황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가요디란 놈이 담장 안에까지 들어와 오리

새끼를 물어갔다는 가정을 하기도 어렵다. 가장 혐의가 짙고 가능성이 농후한 놈이라면 단연 라쿤이다. 이 콘도

미니엄 단지에 버젓이 제 둥지를 틀고, 사람과 맞닥뜨려도 여유 만만한 그 놈이 아니고서는 달리 의심할 대상이

없다.

 범인을 지목하고 나니 불안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일어났다. 남은 새끼오리 세 마리도 언제 그 놈의 밥이 될지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당장 오늘 밤에 또 한 마리가 잡혀 먹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

로 개울을 따라 헤엄쳐가는 오리가족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한 나를 비웃듯 오리가족의 뒷모습은 봄나들

이라도 나온 듯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2012.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