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건너 오두막-버거킹 창가에서
2014.01.26상세 본문
버거킹 창가에서 / 이 용우
나는 지금 LA 코리아타운외곽의 라브레아 길에 위치한 버거킹 창가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같은 몰에 있
는 스타벅스에 갱스터 같은 패거리들이 둘러앉아 왁자지껄 떠들고 있어서 이곳으로 밀려왔다. 버거킹 케시어가
스페셜이라며 커피를 27센트만 받아서 잠시 피로가 풀렸다.
토요일인 어제 오후 3시까지 오버타임을 하고 돌아와 밥 한 술 떠먹고, 교회 본당에서 진행된 김춘근 장로의 솔
루션집회에 참석했다. 10시가 다되어서야 집회가 끝났다. 성가 연습을 위해 먼저 떠나느라 차를 따로 가지고 간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린을 데리러 가야 한단다.
금요일저녁에 역시 김춘근 장로의 ‘Kingdom Dream’에 참석했던 그린은 고등부의 스케줄에 따라 철야기도회를
하고, 다음날 아침 레이크뷰 시니어센터로 옮겨 특별예배를 드렸는데, 그 모임이 끝난 후 교회친구와 UCI 도서관
으로 가서 우리 집회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그린은 도서관이 9시에 문을 닫아서 곁에 있는 샌드위
치샵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얼마 후 우리 세 식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실에서 만났다. 서로 간단한 안부를 나누고 서둘러 침실로 향했다.
리빙룸 소파 위에 미처 못 갠 빨래가 산처럼 쌓여있었지만 ‘오늘은 못해’ 하는 아내의 말에 미련 없이 발길을 돌
렸다. 이미 시간은 1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 6시가 조금 넘어 아내는 교회로 떠났다. 잠시 미적거리던 나도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평소 같
았으면 3부 예배참석으로 10시 너머까지 느긋하게 후벌 잠을 즐겼을 텐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오늘
만이 아니라 이 3월 달 내내 일찍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순이 속한 다락방이 3월의 식당과 주차장봉사를
맡았기 때문이다.
교회 주방에 도착해 보니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지난해까지는 순모임이 주방봉사만 했었는데, 올 해부터는 주
차장봉사도 함께 맡겨지므로 해서 남자부족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원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해서
주방을 원했지만, 다른 남자교우들은 대게 주차장봉사를 자원했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국솥이나 밥솥을 들어 올리고 내린다든지, 그것을 비우고 씻는 일들이 모두 남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주
방을 지원한 남자는 나까지 달랑 두 사람뿐이었다. 다행이 나 외의 다른 남성이 바로 타고난 봉사자인 나 집사였
기에 망정이지 그렇지않았더라면 단단히 홍역을 치를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 비워낸 뜨거운 밥솥을 씻
고, 뜰채로 국건더기를 건져내느라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8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인 봉사시간을 다 마치지 못하고 EM예배시간에 맞춰 그린을 데려와야 했기에 나
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린에게 카페에서 파는 김밥 한 줄을 사 먹여 교육관으로 보내고, 나도 서둘러 3부 예
배에 참석했다.
3부 예배는 11시 30분에 시작해서 대게 12시 40~50분쯤에 끝나는데 오늘은 1시를 훌쩍 넘겼다. 매 달 첫 주에
행하는 성찬식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주말의 솔루션집회 강사이신 김춘근 장로님의 열정적인 설교가 시간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강사의 달변에 푹 빠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몸이 달았다. 왜냐하면 늦어도 2시 30분까지 그린을 LA에
있는 친구네 집에 데려다 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LA 라브레아에 사는 친구네 집에서 5년 전 졸업과 함께 헤어
진 그린의 초등학교 동창생 네 명과 만나기로 한 주일 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다.
1시 30분이 넘어서야 겨우 LA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오늘의 일정에 추가할 일이 한 가지가 더 깔려있었다. 바로
매 달 한 차례씩 방문해온 그린의 외할아버지와 LA에 가는 길에 만나기로 어제 저녁에 급히 약속을 했던 것이다.
항상 그런 시간을 내기가 어렵기에 옳다구나 하고 전화를 했던 것인데 그러다 보니 일정이 너무도 빽빽하게 짜
여버렸다. 허지만 이런 무리를 하지 않고는 엮여진 관계들을 소화해내기가 어렵다.
이렇게 꽉 짜인 시간표의 틈을 찾다가 떠올린 것이 그린이 친구들과 노는 사이에 나는 길바닥에서라도 글을 써
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진즉에 노트북을 트렁크에 실어두었었다. 글을 쓸 때는 아내가 곁에 오는 것도 싫
어할 만큼 조용한 분위기를 원하는 내가 지금 어쩔 수없이 버거킹 창가에서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다. 대여섯 살
아이 둘과 함께 햄버거를 들어 올리며 부에노, 부에노, 웃어 젖히는 남미계 가족을 뒤에 두고 나는 지금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2013.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