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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 – 싱글 순 엿보기 / 이 용우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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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엿보기 / 용우

 

 지난 시월 첫 주일오후에 나는 본관 130호에서 ‘신약의 파노라마’ 접수를 보고 있었다. 여러 교우들이 등록을 하는 가운데 남성 싱글 순장인 L집사도 보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 차례가 되자 40달러를 내는 것이었다. 한 사람당 등록비가 10불이었기에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더니 뒤쪽을 가리켰다. L집사 뒤에 세 명의 중년 남자들이 싱글싱글 웃으며 서 있었다. 순간 감동이 되었다. L집사가 자기 돈으로 등록비를 내주면서까지 순원들을 성경공부에 데리고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끔 식당에서 배식을 기다리며 둘러볼라치면 L집사를 비롯한 중년사네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럴 때면 나는 저 사람들이 모두 싱글 순원들이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수요일 저녁예배 후에 열리는 순장회의 때 만나게 되는 L집사는 항상 신중한 언행과 예의바른 태도여서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우리 순은 격주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나는 순장회의에도 두 주에 한 번꼴로 참석한다. 싱글 순은 매 주 모임을 갖는 모양이었는데 아무튼 순장회의에 참석해 보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L집사는 항상 얼굴이 보이는 모범 순장이었다.

 호감은 관심을 유발한다. 더구나 나 역시 그처럼 싱글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기에 관심의 정도가 더 컸는지 모른다. 허지만 직접 대놓고 사연을 말해보시오,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나는 싱글 순예배에 참석해 보기로 했다. 나눔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윤곽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L집사 외에도 마치 목자에게 끌려가는 양떼처럼 불평 없이 그의 뒤를 따르는 순원들의 근황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스펠프로젝트에서 만난(지난 8월 마지막 주 토요일부터 시작한 가스펠프로젝트에도 역시 나는 봉사자로, L집사는 수강생으로 참여하고 있다) L집사에게 싱글 순예배에 참석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혼쾌히 환영했다. 매 주일 3부 예배 후에 식당에 모여 점심식사를 하고 길 건너 비전센터로 옮겨 순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주일인 다음날 3부예배 후에 식당으로 갔더니 세 사람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 중 한 명인 K집사는 교우 이전에 가든그로브의 기원에서 바둑친구가 된 구면이었다. L집사는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카페로 가더니 사람 숫자대로 아이스커피를 사왔다. 우리는 모두 냉커피를 손에 들고 함께 비전센터로 건너갔다.

 매사에 빈틈없는 L집사는 순장답게 준비가 철저했다. 여러 종류의 쿠키와 캔디 같은 간식거리에 곁들여 알알이 따서 깨끗이 씻은 포도까지 테이블위에 한 상 가득 차려냈다. 내가 훌륭한 순장님, 이라고 치사를 했더니 보통 쿠키 정도 마련하는데 오늘은 손님이 오신다고 해서 특별히 한국포도까지 준비했다 하여 모두 웃었다. 그렇게 쿠키와 포도를 먹으며 어찌어찌 대화를 나누다보니 예배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눔이 먼저 이루어졌다. 내가 전처 사별 후에 어린 딸을 키우며 어려움을 겪어보았기에 싱글로 사는 여러분들의 고충을 위로하고자 왔다고 순예배 참석이유를 밝혔더니 금시 대화가 술술 풀렸다.

 그런데 이어진 L집사의 말을 들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순원 모두가 순수 싱글만은 아니었다. 순원으로 등록된 7~8명 중 진짜 싱글인 사람은 세 명이고 나머지는 본국의 현지법인에 발령받아 먼저 건너와 있는 주재원, 또는 임기를 마치고 뒷마무리를 위해 혼자 남은, 또는 일정기간 연수차 도미해 있는, 각각의 형편에 의한 한시적 싱글남 들이었다. 그런 설명을 듣고 보니 마음이 제법 편안해졌다. 나는 아, 그렇군요, 하고 하하 웃으며 이번에는 L집사를 꼭 집어 물었다.

 “어쨌든 순장님은 틀림없는 진짜 싱글이지요?” L집사는 내 말에 허를 찔린 듯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리더니 아, 예에~ 그렇습니다, 진짜 싱글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하고 말을 더듬었다. 말끝을 흐린 L집사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예, 현재 법적으로 저는 분명히 싱글입니다, 그런데 심정적으로는 저 스스로 싱글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내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저를 받아주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L집사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을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했다.

 나는 빨리 이해하기 위해 ‘집사님이 무엇을 크게 잘못하신 모양이지요?’ 라고 물었다. 내 말에 L집사는 지체 없이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L집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그의 아내는 저렇게 순수한 남편을 어째서 용서하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저만한 인격체라면 오히려 용서를 통해 부부생활이 더욱 견교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 탠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나의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L집사는 내가 이해하기 쉽도록 자신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L집사는 오히려 결혼 당시 어려운 문제 앞에서 자기희생적 용단으로 혼인을 성사시킨 아내에게 배신감을 심어준 자신이 나빴다고 거듭 자책하기까지 했다. 언 듯 L집사의 잘못이라는 게 이성문제라고 단정하기 쉽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떤 일로 인해 빚어진 부부간의 신뢰에 관한 문제였는데, 아무리 헤아려보아도 내 무딘 감성으로는 L집사가 지금 싱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부당하게만 여겨졌다.

 이쯤에서 고백하지만 나의 그날 싱글순 방문목적은 그리 순수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L집사의 신상을 상세히 파악하여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지면 어떤 여성과 소개팅을 시켜줄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의 엉큼한 계획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리 억울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계획이라는 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것이었는데, 나의 수고를 거치지 않고도 스스로 그 길을 찾아 놓았다 하니 나로서는 그리 손해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뜨끔했던 마음을 감추고 ‘집사님의 바램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라고 축원했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