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건너 오두막-딸을 믿다
2017.12.20상세 본문
딸을 믿다 / 이 용우
-저 가시네가 글쎄 파티에 가져갈 소주사면서 감 한 봉지를 올려놨더니 ‘이거 내가 페이 해야 돼?’ 그러잖겠어, 정말 어이가 없어서.-
저녁을 먹다말고 문득 생각났다는 얼굴로 아내가 투덜거렸다. 듣고 있던 나는 감 값이 문제가 아니라 소주를 샀다는 말에 더 놀랐다.
-소주를 샀어? 몇 병이나?-
-네 병, 오늘 저녁에 학교클럽회원들과 플러톤에서 연말파티를 한다는데 그린에게는 소주를 사오라고 했데, 한국소주가 외국아이들에게 인기라는 거야. 케이팝 잘 부르는 애들도 많데, 자기도 모르는 한국노래를 외국친구들이 더 잘 부른다고 하네.- 나는 식사를 마치고 그린의 방으로 갔다.
-그린아, 운전해야 되는데 술 마시면 안 되잖아?- 내 말에 그린은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은 채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 운전 안 해, 친구 차로 갈 거야.-
-친구가 술 많이 마시면 어떻게 하나? 아, 우버 타고 오면 되겠다. 그리고 파티장소에 선생님이나 아니면 너희들 지켜주는 어른이 있니?- 내 말에 그린은 고개를 발딱 쳐들었다.
-아빠, 내가 어른이잖아!- 그 대답이 너무 빨리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는 한 방 맞은 사람처럼 머쓱해졌다. 참견하는 아빠가 미워죽겠던 참에 옳다, 잘 걸렸다, 하는 모습이다.
-어, 그렇지…. 하지만 넌 아직 학생이잖아, 아빠는 걱정 돼서 그러는 거고.-
-알았어, 아빠, 걱정하지 마. 난 베이비가 아니야.- 그린의 항변에 나는 더 어쩌지 못하고, ‘알았어,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일찍 들어와.’ 하고는 내 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헌데 그날 밤 그린은 12시도 되기 전에 귀가했다. 이 밤 안에 돌아오기나 할까, 하고 염려하던 나는 그린이 들어오는 문소리에 놀라 아내에게 ‘빨리 불 꺼!’하고는 자는 척 숨을 죽였다.
캘스테이트 플러톤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는 그린은 지금 대학 3학년이다. 일 주일 중 하루만 학교수업을 듣고 이틀은 병원으로 실습을 나간다. 그동안 Long beach Hospital과 UCI Hospital 두 군데에 견습생으로 나갔는데 롱비치는 지난 주로 끝마치고, 새해부터는 산타아나에 있는 St Joseph Hospital의 어린이병동으로 실습지를 옮긴다.
그린은 학과공부와 병원실습을 빼고 남은 주 3일을 우드버리 몰에 있는 트레이더죠스에서 하루 8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한다. 지난 여름방학부터 시작한, 그린으로서는 생전 처음해보는 단기직장생활이다. 제법 까다로운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은 그린은 시간당 15달러로 두 주에 한 번 페이를 받는데 세금을 떼고도 오백불 가까운 돈이 그린의 은행어카운트로 자동입금 된다. 지난 추수감사절 직전에는 손님이 넘쳐난다고 오버타임을 하더니 평소보다 훨씬 많이 받았다며 몹시 좋아했다. 요즈음 그린은 돈벌이에 신이 났다.
그린의 첫 생일날 돌잡이 때 지폐 3장, 연필과 그림책, 그리고 장난감을 상위에 늘어놓았는데, 처음에 돈을 집어 들기에 뺏고 다시 집으라고 했더니 또 돈을 집고, 다시 반복했지만 그린은 세 번째까지도 역시 돈을 집어 들어서 둘러선 사람들이 ‘그린이는 부자로 살겠다’고 덕담을 하며 웃었다. 그래서인지 그린은 어려서부터도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인색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홈리스에게 주라고 돈을 쥐어주면 ‘싫어, 내가 가질 거야!’ 라며 뒤로 감추고, 옆집아이와 같이 먹으라고 준 쿠키봉지를 자기 주머니에 쑤셔 넣곤 했다. 햄버거와 함께 나온 감자튀김 하나도 자기 것은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런 아이이니 제 물건을 사며 아내가 무심코 올려놓은 감 한 봉지를 ‘이거 내가 페이 해야 돼?’ 라고 반문한 것은 그린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허지만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린은 자동차유지비는 물론 자기 의상구입과 용돈, 그리고 보험료까지 충당하고 있다. 그린이가 짠순이라고 투덜대는 아내도 이제는 착한 딸이라고 칭찬이 잦다. 그린이 아르바이트를 갖기 전까지만 해도 빠듯한 생활비에서 매 달 몇 백 불씩이나 아이 밑으로 들어가던 지출이 줄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가끔 그렇게 감 한 봉지도 제 것이 아니면 지불하지 못하겠다고 얄미운 짓을 해서 그렇지 이제 다 키웠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그린은 한 사람 몫을 하고 있다.
어제 토요일, 나만의 바쁜 일로 회사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데 카톡이 울더니 잠깐 사이를 두고 또 한 번 카톡, 했다. 전화기를 집어 들어 카톡창을 열었다. 우리 식구 방에 싸인이 들어와 있어서 얼른 클릭했다.
-I just landed in Spain!-
-야호!!! 장하다 우리 딸!!!-
위의 것은 막 스페인에 도착했다는 그린의 글이고, 아래 것은 아내의 답신이었다. 그린이 어제 저녁에 하이스쿨 친구 네 명과 함께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칼 등 유럽 삼 개국 여행을 떠났는데 첫 기착지인 스페인 공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12월 15일에 떠나서 29일에 돌아오는 두 주간의 여행이다. 나도 얼른 ‘와, 잘 도착했구나, 축하한다! 라고 카톡을 쳤다.
겨울 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떠난 유럽여행도 그린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자기 돈으로 항공권도 사고 그곳에서의 경비도 지출한다. 우리가 한 푼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고도 그린의 은행어카운트에는 ‘Something Thousand,’이 남아 있다. 돌잡이 때 1불짜리 지폐만 세 번 집어든 아이답게 주머니가 두둑하다. 그래도 공항에서 내가 귓속말로,
-그린아, 조카들 선물 몇 개만 사와라, 일 달러짜리로 라도…- 했더니 그린은 대번 정색을 하며 눈을 흘겼다.
-아빠, 나 그렇게 부자가 아니야.- 한다. 그래서 얼른 지갑을 열고 20달러 지폐 하나를 꺼내주었다. ‘됐어, 괜찮아.’ 할 줄 알았더니 얼른 받아 넣는다. 과연 짠순이답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고 웃었다.
-짠순이면 어때, 속 안 썩이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 아내와 내가 가끔씩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