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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권의 영혼의 창 – 왜 선함만을 보시나요

2013.09.29

상세 본문

*왜 선함만을 보시나요

 

깊은 백발이 멋진 커리스 교수가 오늘 히브리 수업에서 한 말씀이다. 결혼식에 주례를 보러 가서 종종

인용하는 구절로 잠언 18장 22절을 대셨다. 한글성경으로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집에 와서도 이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원어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아내를 얻지 못한 자는 그럼 복을 얻지 못한 자인가? 거꾸로 남편을 얻는 아내도 역시 복을 받는게 아닌

가? 조금 엉뚱한 질문일지 모르지만 이런 유의 경계를 넘어선 질문은 성경 텍스트를 들여다보는데 늘 소

중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또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귀중한 도입부 역할을 한다.

잠언의 많은 부분이 애굽 등 인접국가의 윤리적, 경구적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왔고, 절대적 진리라기보

다는 상황적 진리의 색깔을 띠는 경우가 많은지라 잠언의 문자적 표의를 넘어서 성령께서 이 문장들을

통해 예표하려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함의를 이해하려고 애써왔다.

잠언 18장 22절의 원어는 "마차 이샤흐 마차 토브"로 시작한다. 즉, "아내를 발견하는 사람은 선한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다"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번역 가능한 게 아니다.

"아내를 발견하는 사람은 그 아내 안에서 선한 것만을 발견하는 사람이다"라는 번역이 훨씬 훌륭해 보인

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와 교회된 우리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

이며, 교회된 우리는 그분의 아내가 되었기에 잠언 18장 22절은 이런 함의를 노출시키고 있다.

"교회와 결혼하게 된 예수 그리스도는 그 교회 안에서 오직 선한 것만을 보게 된다."

즉, 성도는 주님의 것이 된 순간부터 그리스도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도 안에서 죄를 발견

할 수 없게 된다. 성도가 죄 때문에 매이고 힘들어하고 위협을 느끼는 것은 보혈이 얼마나 값지고 대가

가 큰 것인지를 오해한 데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주님께 기도로 나아갈 때에 죄 사함의 은혜가 측량할 수 없이 커서 내 영혼의 시선이 자유를

누리며 오직 주님께로 향하는 것이라면 괜찮지만, 온갖 지은 죄가 마음속에서 올라오면서 그 죄들이 나

를 자유롭지 못하게 꽁꽁 매고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십자

가를 다시 지셔야 하는 게 아닌가" 혹은 "이 죄를 없애기 위해 내가 뭘 해야하지"라는 식의 생각이 영혼

을 이끌고 간다면 오직 거기에 주님의 눈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이제 성도들이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고 영적 전쟁에서 성도들이 승리할 수 있는 이

유는 하나님께서 교회된 성도들 안에서 선한 것만을 보실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선하지 않고 악한 것들이 당연히 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 모든 죄와 벌을 다 지셨기 때문에 선한

것만을 보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

게 보고 계신가에서 멀어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말하는가에 더욱 관심을 쏟다가 값진 삶의

많은 부분을 쓰레기 더미에 엉켜 씨름하다 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헬라어 '로기조마이'를 즐겨 썼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신다고 밝히고,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 여기라고, 즉 '로기조

마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로기조마이'를 더 쉽게 풀면, 회계장부의 대차대조표상에서 원래 부채가 있

었지만 그 부채가 없는 것으로, 상쇄된 것으로, 말끔히 순결한 상태가 된 것으로 처리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차변의 부채가 제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결산은 언제나 제로가 된다. 아니 오히려 수익이

있는 상태가 된다.

사단은 성도들에게 다가와 하나님이 당신의 선함(토브)만을 보신다는 것을 숨기고, 하나님이 당신의 악

함(라이)을 뚫어져라 보고 계신다고 협박한다. 이 과정에서 윤리적인 명령이 동원되기도 하고, 종교적인

형식이 씌워지기도 하고, 조건적인 길흉화복의 잣대가 제시되기도 한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겁을

주고 또 겁을 주며 그 겁에 질겁하여 안식으로부터 멀어진 영혼들을 삼키기 위해 쏘다닌다. 사단은 하나

님의 주소가 마치 시내산인 것처럼 속이는 것이다.

나는 가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가 되어본다. 그리고 복음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강

도는 강도이고 곧 죽을 것이고 죽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강도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강도의

모든 실존이 바뀌었다. 완전성을 획득했다. 윤리적 삶을 더 살아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지식적 깊이

를 더 파야하는 것도 아니었고, 선교의 최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 세상이 평가하는

성공의 삶을 살아보여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365일을 살아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의 가치를 절하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복음의 과녁을 맞히고자 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 때문에, 신을 죽인 살인자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아들

로서의 온전한 신분을 획득하고 거룩성을 입은 채 풀려나는 것이 복음인 것이다. 우리가 대부분은 그 절

박한 강도가 아니기에 아침에 눈을 뜨면 복음에 뭔가를 자꾸 갖다 붙이고 싶어 한다. 자꾸 땅을 갈고 싶

어 한다(창 3:19).

주님께 사로잡힌 강도는 이제 주님의 품을 벗어날 수 없다. 발버둥치고,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더라

도 주님은 결코 강도인 우리를, 살인자인 우리를 놓치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며 읊조리는 말, "엘로힘 아도나이"에 붙여, 오늘은 종일 잠언의 이 네 단어를 함께 읊

조리며 예수의 얼굴을 본다. "마차 이샤흐 마차 토브"

 

cha

 

/ 차명권 전도사(온누리교회, HEART min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