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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그랬구나

201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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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 홍순복

 

 조금 일찍 퇴근했다. 집으로 들어서니 텔레비전은 딸아이 등 뒤에서 혼자 떠들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은 그린은 뭔가를 노트에 적으며 친구와 화상으로 말하고 있었다. 친구아이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

면 그린이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치며 춤추고 낄낄댔다. 슬쩍 텔레비전 채널을 한국방송으로 돌

리자 딸아이는 자기가 보고 있다며 잽싸게 다시 바꾼다. 얄미워서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 무슨 숙제를 그렇게 하니, 티브이는 끄고 …..친구와 그만 떠들고…"

 순간 기분이 상해 잔소리를 소나기처럼 퍼 부었다. 허지만 아이는 그렇게 해야 공부가 잘 된다며 제 친

구들도 세 가지를 동시에 한다고 항변했다.

 숙제부터 하라고 잔소리 해봐야 말하는 사람 입만 아프다. 이층으로 올라가는게 상책일 듯 싶었다. 딸

아이 방에 들어섰다. 벗어놓은 팬티가 둘둘 말려 카펫바닥에 널려있고 청바지는 벗기가 힘들었는지 뒤

집힌 대로 몸만 빠져나와 문 앞에 길게 널브러져있었다. 양말 한 짝은 의자 밑에 또 하나는 침대 밑에 떨

어져 있다. 이것저것 옷가지를 꺼내 입어 본 후 맘에 들지 않아 의자위에 쌓아 둔 듯 모습이 넝마더미 같

았다. 나도 꽤 털털한 편인데 이건 너무 하단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새엄마와 잠시 살았던 주인공아이가 제 친엄마에게 일러바치던 장면이 생각났다.

자신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팬티를 새엄마가 옷걸이에 걸어 책상위에 놓아두었다는 이야기

를 하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 말을 듣던 아이의 친엄마가 그건 네가 잘못했어, 라고 오히려 자

기 딸을 나무랬다. 정말 아이들의 그런 버릇은 새엄마 친엄마 가릴 것 없이 누구라도 너그러울 수 없을

것이다.

 온몸이 천근만근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간단히 저녁 먹고 한잠 자고 싶은데 그린이 수영을 가자고

했다. 힘들어, 내일 가면 어떠냐고 해도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내가 가고 싶고 갈 수 있는 시간이 오늘인

데 왜 안 되느냐고 따진다. 엄마노릇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혼자 살 때 내 마음대로 즐기던 것들이 머릿

속에 주르륵 떠올랐다. 피아노를 치며 마음껏 노래 부르고 찬양하던 것이나, TV 보며 망중한을 즐기던지

아니면 강아지 구찌와 소파에 누워 장난치던 일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결국엔 그린의 끈질긴 요구에 두 손 들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주섬주섬 수영복과 타월 샴푸 등이 든

가방을 챙겨들고 추운 저녁바람을 맞으며 피트니스를 향해 집을 나섰다.

" 엄마, 라디오!'

차의 시동을 걸기가 무섭게 그린이의 주문이 날아왔다.

" 가시네, 차가 출발이나 하거든 말하지……"

 내가 핀잔을 주자 그린은 미안했는지 헛웃음을 히히거리며 탱큐, 한다. 음악이 나오자 그린은 차가 흔

들리도록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춤을 춘다. 차안에 먼지가 일며 기관지가 약한 나는 재채기를 터트렸다.

 딸아이는 물개처럼 수영을 잘한다. 어릴 때 아이는 물을 무서워했다고 했다. 그런 아이를 제 아빠가 물

두려움증을 없애 주기위해 수영코치에게 레슨을 받게 한 것이 주효하여 이제는 물개처럼 수영을 잘 하

는 아이가 되었다. 자유형은 물론 배영과 접영, 양손으로 물속깊이 잠수하는 것 까지 모든 동작이 춤추

는 것처럼 유연하고 멋지다. 그린은 나에게도 수영 레슨을 해줬지만 따라하다가 물만 먹기 일쑤였다. 어

떤 백인 아저씨가 그러지 말고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수영법으로 하라고 해서 나는 그때부터 열심히 개

구리헤엄만 쳤다.

 한참 헤엄을 치고 있는데 그린이 보이질 않았다. 분명 내 앞으로 간 것 같은데 없다. 물 밖으로 나갈리는

없는데 이상했다. 그때 갑자기 뭔가가 내 다리를 확 잡아당겼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린이었다. 물속

에서 몸을 돌려 내 쪽으로 잠수해 온 것이다. 그린은 나의 놀란 모습이 즐거운 듯 깔깔거리며 말 타듯 내

등에 올라붙었다. 그리고 빨리 앞으로 가라고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아이의 거친 행동에 놀라고 화가

난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그린아, 물속에서까지 못살게 구니, 제발 나 좀 그만 괴롭혀!"

그러자 그린은 내 등에서 슬며시 내렸다. 그리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 엄마, 내가 뎃가이와 (제 아빠에게 불평을 할 때면 그린은 제아빠를 뎃가이That guy 라고 부른다.)살면

서 아무것도 못해봤어. 그래서 지금 그걸 다 하고 싶은 거야. 엄마가 나를 이해해줘. 에너지도 넘치는데

어디에 쓰겠어. 엄마뿐이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표정과 목소리가 제법 진지했다. 눈에 반짝 물 기운이 보였다. 수영장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한번만 불러도 되는 엄마를 엄마, 엄마, 엄마하며 빠르고 크게 연달아 부르는 아이. 아무 때나 포옹하고

얼굴을 부비며 엄마 사랑해, 엄마도 나 사랑하지? 하며 곧바로 대답을 원하는 아이. 침대위로 나를 밀치

며 간지럼을 태우는 아이, 내 가슴을 슬쩍 만지고 달아나는 아이. 나를 큰소리로 부른 후 돌아서서 순식

간에 바지를 내려 자기 엉덩이를 쑤욱 내밀어 보이곤 도망치는 아이. 티셔츠를 훌떡 걷어 올리고 덜 익

은 가슴을 얼른 보여주는 아이. 숙녀가 그러면 못쓴다, 해도 엄마니까 보여주지, 하며 깔깔거리고 웃는

아이. 친구들과 놀다가 별 볼 일 없이 전화해서는 엄마, 하고 불러 내가 왜? 하면 그냥 했어, 하고는 전화

를 뚝 끊는 아이.

 그랬구나,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아이의 진심을 비로소 확연히 알게 되었다.

 저만치 그린이 물개처럼 헤엄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