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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추억 지우기

201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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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지우기/ 이용우

 

 육십 중반의 초상화가는 연신 생글생글 미소를 흘리며 재바르게 손을 놀렸다. 한 십 초쯤 화폭에 눈을

박았다가는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려 사 오 초정도 세심히 살핀 후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 서각사각 펜화

를 그렸다. 조금 전 값을 흥정할 때의 억양으로 미루어 중국인이 틀림없는 거리의 초상화가는 사 오 초

정도 관찰하고 십여 초쯤 그리는 작업을 쉼 없이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늙은 화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캔버스위의 화지를 번쩍 들어 우리 쪽으로 돌려보였

다. 아내의 상반신 모습이 화폭의 왼쪽 하단에 낯선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린이 히히, 하고 웃었다.

아내도 터무니없이 젊게 그려진 자신의 모습이 쑥스러웠던지 픽 웃었다. 늙은 화가는 그것이 좋다는 의

미로 해석을 한양 굿? 하고 되물음을 던지더니, 화지를 캔버스 위로 가져가 이번에는 그린의 얼굴을 그

리기 시작했다.

 아내와 그린이 나란히 의자에 앉고 나는 뒤편 가운데 선채로 우리 세 식구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재미있

어 하는 눈길을 받았다. 앞에 앉은 그린과 아내는 무슨 얘긴가를 귓속말로 주고받으며 킥킥거리고 있었

지만, 나는 벌써부터 저만치 펼쳐진 샌프란시스코 만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아득한 상념에 잠겨있었

다.

 15년 전이었다. 그 때 나는 그녀(그린의 생모)와 함께 겨우 샌프란시스코로 신혼여행을 왔었다.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를 타고 해안가를 따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우리는 계획도 없이 멋대로 돌아다니다

가 어느 상가모퉁이 보도블록위에 화구를 펼쳐놓고 있던 젊은 화가 앞에 나란히 앉아 초상화를 그렸다.

기억하기로 그때 역시 실제 보다 훨씬 젊게 그려진 초상화를 받아들고 그녀는 호호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여행을 온다면 그때는 초상화에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나겠지? –

-응? 오 그렇지,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안될게 뭐가 있겠어.-

 엉겁결에 서로 묻고 답하고 맞장구를 치며 우리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한참이나 폭소를 터뜨렸었다. 여

행길에서 웃음으로 주고받았던 그 이야기들은 한 순간의 윤활유가 되어 샌프란시스코의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 이야기를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그녀는 얼마 후 임신을 하여 그린을 낳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나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어느 날 대청소와 함께 집안정리를 하다가 앨범박스를 열게 되었다. 박스 귀퉁이에 돌돌 말려 고무 밴드

로 묶여 있는 종이다발이 눈에 띄였다. 무언가 하고 펼쳤더니 바로 그 초상화였다. 그것을 대하자 잠자

고 있던 수많은 영상과 무수한 낱말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다음 여행에는 세 식구를 그리자며 깔깔

웃던 모습과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이후로 가끔씩 초상화에 얽힌 단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물론 주변 환경이나 분위기 따위로 유발되는

현상이겠지만, 음악을 듣는다거나 책을 읽는 중에 아니, 프리웨이 전방에 펼쳐진 풍경에 넋놓고 있다가

문득 그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리고 그 단상의 끝은 언제나 세 식구를 그리자던 말이 떠오름으로

해서 가슴을 아리게 했다.

 12월의 마지막 주에 우리 세 식구가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일

이었다. 지난 여름부터 세워진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지금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캐나다의 밴쿠버에 가

있어야 맞다. 우리의 7인승 밴을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장거리 여행을 위해 타이어도 모두 새것으로 교체

하고 두터운 점퍼도 구입했다. 그런데 여행 며칠 전에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해서 갑작스럽게 밴쿠버행이

무산되어버렸다. 아내는 장거리 여행이 걱정스러웠는데 잘되었다고 했지만 그린은 불만으로 볼이 잔뜩

부어올랐다. 캐나다 출신의 아이돌 스타 져스틴 비버의 고향을 여행한다고 한껏 들떠 있었기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빠, 밴쿠버 못가면 샌프란시스코에 가자. 캐나다와 가깝잖아."

그린이 입을 빼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그럴듯했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가라

앉은 분위기를 일으켜 세워야했는데 그린이 마땅한 답을 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샌

프란시스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에 쿵, 하는 울림이 온 것이었다. 세 사람이 여행을 간다, 세 식구

가 초상화를 그릴 수 있다! 때때로 가슴을 아리게 하는 그 우울한 추억을 지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 샌프란시스코로 가자.' 나는 혼쾌하게 결정을 내렸다.

 "아빠, 저거 봐. 우리 훼밀리 다 그렸어."

 그린의 말에 회상의 깊은 늪을 헤매던 나는 멀리 던져두었던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뻐드렁니를 드러내

고 환하게 웃는 늙은 화가의 손에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익은 세 가족이 편안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

다. 아내와 그린이 자매처럼 그려져 있었다. 나도 이십 년은 젊어 보였다. 초상화를 들여다보고 또 서로

쳐다보고 하며 우리 세 사람은 한참동안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