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메뉴바로가기
     

개울건너 오두막-꿈속의 여자

2013.11.20

상세 본문

꿈속의 여자 / 홍순복

 

 너른 들판이었다. 언젠가 하계봉사를 갔던 곳 같이 낯익은 풍경이었다. 온 동네가

녹색으로 덮여져 있었다. 그때 먼 곳으로부터 한 여자가 내 쪽을 향하여 서서히 다

가오고 있었다.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사뿐사뿐 춤을 추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 디

디며 오고 있었다. 가까이 왔을 때 보니 그녀의 춤은 고전 무용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우아한 춤사위는 눈부실 지경이었다. 곱고 예쁜 손놀림으로 춤을 추고 있었

다. 그런데 조금 자세히 보았더니 그 춤은 고전 무용이 아니라 어릴 적 보았던 신 내

린 여자의 춤이었다.

 꿈이었다. 나는 자주 꿈을 꾼다. 남편은 내 꿈이 개꿈이라지만 왠지 꿈속의 그녀 얼

굴이 하루 종일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음도 그리 편지 못했다. 남들은 신기한 꿈도

꾸고 그것이 현실에도 똑같이 이뤄지는 일도 있다는데 내게는 언제나 의미 없는 것

들이었다.

 꿈에 본 그녀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기엔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한국

마켓을 가게 됐다. 그런데 그 앞에서 세일즈를 하는 사람이 바로 꿈에서 처연하게

춤을 추던 그녀였다. 그녀의 물품을 몇 번 산 적이 있었다. 인사정도이지 이름이 무

엇인지 어디에 사는지 그녀의 속사정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그녀가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들었다. 바로 그녀의 범상치 않은 춤 때문

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 안녕하세요? 하시는 일은 잘 되세요?"

" 네, 사모님! 그냥 그렇죠."

 먼저 인사를 하자 반갑게 화답을 했다. 사모님 호칭이 왠지 거북스럽게 들려서 그

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자 회사에서 그렇게 하도록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 혹시, 예수님 믿으세요?"

" 아…니요,"

 아니요, 라고 말할 때 그녀는 말을 더듬고 미간을 찡그리며 내천자 주름을 만들었

다. 그리곤 금세 수심어린 얼굴이 되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곱게 화장을 하고 머리

를 뒤로 묶고 예쁜 핀을 꽂았다. 나이에 비해 눈은 맑고 몸매는 가냘팠다. 동양적인

미인 형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주님을 믿으라고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 순간에 내

안에서 소리침을 들었다.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여 마시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며 꿈 이야기를 했다. 허나 그녀의 춤이 신 내린 것 같았다고 말 하지는 않았다.

그저 예쁘게 추더라고 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말에 맥이 탁 풀린 표정을 지었

다.

" 사실 결혼 전까지는 교회에 잘 다녔지요. 그러나 남편이 교회라면 머리를 흔들어

요."

그럼 혼자라도 다니지 그러냐고 했더니 월요일부터 토요일 까지 일하니 일요일 하

루는 밀린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민 온지는 사 오년쯤 되었다고 했다. 꼭 믿

어야 한다고 말하고 앞으로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로 작별인사를 했다.

 그 후론 마켓을 갈 때마다 그녀에게 일부러 들렀다. 지난 십이월 추운 어느 날 이였

다. 집안에서도 한기를 느껴 추웠었다. 밖에 있을 미쎄스윤이 생각나서 가봤다. 그

녀는 밖에 의자하나를 놓고 고객을 만나고 있었다. 실외에서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

니 뜨겁게 달군 마사지 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누빈 솜바지를 입어 춥지 않다며

웃어보였다. 산다는 게 무언지 고생하는 미쎄스윤이 측은하게 보였다. 그녀를 위해

서 기도한다는 말에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책과 쿠키를 구워 남편에게 주라

고 하기도 했다. 나의 중보기도 이름위에 그녀 이름 석 자를 끼어 넣었다. 그래서 기

도할때마다 그녀 이름을 부르고 있다.

 나는 기회가 닿으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종에 상관없이 전도를 하지만 끝까지 열

매를 맺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여고시절 교회 고등부에 다닐 때였다. 새 친구를 데

려오는 날을 정해 나는 같은 반 친구 정희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다시

친구 집에 갔을 때 대문밖엔 정희가 아닌 친구 아버지가 나와 서성거렸다. 나는 꾸

벅 인사를 했다. 그때 친구아버지는 내게 다짜고짜 화를 내며 당장 가라고 호통을

쳤다.

" 교회당인지 연애당인지 우리 정희 그런 곳에 데리고 가지마. 그러려면 너, 우리 집

에 오지도 말아라!"

친구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딸처럼 다정하게 대해주었는데 그날은 무섭게 나를 몰

아세우고 쇠대문이 부서져라 힘껏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한참을 울었다.

그 후로는 정희를 교회에서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희 동생의 병으로

온 집안이 믿게 되는 일이 생겼다. 정희 동생은 신부전증으로 늘 엄마 등에 업혀 등

하교를 했다. 호흡이 고르지 못했고 얼굴은 늘 부어있었다. 부유한 편인데 딸의 병

을 고칠 수 없자 검불이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교회로 왔던 것이다. 어느 신유부흥집

회에서 부흥사가 자신의 병이 치유됐다고 믿는 사람은 일어나라고 했을 때 동생은

벌떡 일어났다고 했다. 비록 정희 동생은 세상을 떠났지만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요즘엔 마켓을 자주 못 갔다. 어쩌다 간다 해도 미세쓰윤이 퇴근한 후의 늦은 시간

에 가게 되어 만나질 못했다. 그런데 지난주에 가보니 그녀의 자리가 텅 비어있었

다. 그녀는 비오는 날 이외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테이블 위에 가득 놓였던 물

품들은 어디로 가고 대신 경쟁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작은 플라스틱 깃발만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꾼 듯싶었다. 전화번호라도 알아 놨어야 되는 건데 하

는 후회가 일었다. 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이 마냥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씨 뿌리

는 자와 거두는 자가 각각이라 했으니 언젠가 그녀가 거두는 자의 손에 이끌림을 받

으리라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