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메뉴바로가기
     

개울건너 오두막-싸부남편

2013.12.05

상세 본문

싸부남편/ 홍순복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이 저녁식사 후 이층으로 올라갔다. 나도 부엌일을 마치고 방

으로 올라왔다. 그가 샤워를 하는지 물소리가 들렸다. 하나밖에 없는 목욕탕 덕에

누군가 일찍 하면 고맙기까지 하다. 밤10시가 넘어 한꺼번에 샤워하려면 순서를 기

다리다 서로 눈치를 보기도 한다.

 다른 날 같지 않게 그의 샤워시간이 길다. 거울에 김 서림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목욕탕 문이 조금 열려있었다. 그 틈새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귀를

기우렸다. 누군가를 꾸짖듯이 큰소리를 치다가 갑자기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

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장거리 운전으로 힘들어 하더니 뭐가 잘못되었나, 아니면

혹 나 모르는 몹쓸 병이라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이상한 상상으로 가슴이 먹먹해왔

다. 그가 또 누군가를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수지 이거 무슨 짓이야

당장 나가지 못해? 내 이름은 수지가 아니라 순복인데 누굴 부르는 건지, 대답을 해

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분간이 서질 않았다.

 회사에서 내 이름 첫 자 순이 어렵다고 수니라고 부르긴 해도 그것을 남편이 알 리

가 없다. 그게 아니면 도대체 수지가 누군지 헷갈렸다. 얼른 그린의 방으로 달려갔

다.

" 그린아, 아빠가 조금 이상해 아무도 없는데 혼자 웃고 소리치고 그래."

" 응, 그냥 나둬. 조금 있으면 끝날 거야."

 아이의 대꾸가 더욱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제 아빠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얼굴

로 태평하게 말하고 있다. 아빠가 왜 저러느냐고 재차 캐물으니 엄마 굿나잇, 하며

가라고 손짓을 한다.

" 그런데 그린아 수지는 누구니?"

" 아빠 애인."

 웃지도 않으면서 심각하게 내게 말하는 아이의 표정이 나를 더욱 혼돈스럽게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굿나잇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샤워를 마친 남편이 잠옷으

로 갈아입고 있었다.

" 수지가 누구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애인, 이라고 했다. 나는 무슨 애인이 있어 나 말고, 하며

침대 끝에 걸터앉은 그를 밀치며 말했다. 갑자기 그는 껄껄 웃으며 재미난 듯 나를

바라봤다.

" 소설 쓰고 있었어. 내가 일인 3역을 한다고. 그래야 글이 써지거든."

수지는 소설속의 여주인공이란다. 나는 소설을 딱 한번 그것도 6개월을 걸쳐 썼건

만 누구에게 보일 수도 없이 부끄러워 컴퓨터 안에서 잠자고 있다. 소설쓰기를 접은

것은 당연히 남편 때문이다.

 얼마 전 고인이 된 박완서 소설가가 엘에이에 왔을 때 누군가가 소설쓰기가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하면 소설을 쉽게 쓰나요? 하고 질문을 했더니 박완서씨는 힘들

면 쓰지 마세요. 쓸 사람 많으니까 그냥 독자로 남으세요. 라고 속사포처럼 쏘아 댔

다는 것이다. 어떤 시인이 나에게 소설 쓰면 팍팍 늙는다고 겁을 주었다. 실제로 어

느 소설가는 장편을 쓰고 나서 이가 다 빠졌다는 소리도 들었다. 사실 늙을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든다. 온 정신을 쏟아야 한다. 언젠가 남편은 내 말끝에 머리가 나쁘

니 소설을 못 쓴다고 말했다. 그것은 두고두고 기분을 상하게 해 나는 가끔씩 화가

날 때면 그에게 그말을 트집잡아 까탈을 부르기도 한다.

 나는 혼자 있을 때 글이 써진다. 늘 딸아이가 함께 있고 할 일도 많아 주중에는 글

쓰기가 어렵다. 나는 회사에서 근무 중에도 뭔가가 생각이 떠오르면 얼른 메모를 해

둔다. 너무 속필로 써서 어느 땐 내가 쓴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 한참 들여다보곤 한

다. 그리고 타이핑을 하고 프린트를 해서 고치고 또 수정 하는 식으로 글을 쓴다. 그

러나 남편은 느리지만 타이핑이 끝나면 수정할 것 없이 완벽하게 글이 완성되는 스

타일이다. 그래서 나처럼 종이를 낭비하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나는 내 방식이 좋

다.

[개울건너 오두막] 을 6개월 쓰고 보니 무엇을 써야하나 고민을 하게 된다. 남편은

그런 내게 실망이라며 문인 자격을 운운한다.

 내가 '봄날은 간다." 를 쓰면서 노래 부르는 언니의 몸짓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를 못

찾아 애먹을 때 남편은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손을 일렁이며 손춤

을 추기 시작했다. 양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흔들며 그네 타듯 노래의 박자를 따

라 움직였다. 그러더니 넘어지는 장면은 정말 한번 넘어지면서 상황을 연기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머리로만 생각하며 썼었다. 그의 글쓰기 법이 정말 무릎

을 칠 정도로 맞는 말이었다.

 " 널린 게 글감이야. 꼭 대단한 것만 쓰려고 하지 마. 저 봐, 우리 집 스카이라이트

도 얼마나 멋져. 두 나무가 보이잖아 당신 쪽에 누우면 유클립스 나무이고 내 쪽에

는 소나무가 보이잖아. 30년이 넘은 저 나무들 바람이 불면 서로 껴안듯 부딪치는

저 모습을 그냥 써."

주로 토요일 아침에 쓰는 것이 제일 좋다. 허나 그린은 맛있고 특별한 아침을 만들

어 달라고 강아지 구찌는 밖에 나갔으면 하고 내 주위를 뱅뱅 돈다.

거울을 보니 머리 파마 할 때가 되었다. 미용실에 가면 반나절은 갈 터이니 다음 주

로 미루고 지금은 이글을 쓰고 있다. 남편은 회사일이 바쁜 날은 토요일 근무를 하

러 간다. 지금쯤 도착했을 텐데 조금 전에 내게 실망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글 한 편

썼다고 말해야지.

 전화벨이 울리자 남편이 받았다. 나는 다짜고짜 글 한편 썼어. 나도 할 수 있단 말

이야, 라고 하자 그는 한수 더 떠, 아까 생각 한 건데 한편 더 쓰지, 천국의 열쇠를 읽

고 난 소감을 쓰면 어때?

" 네, 싸부님, 알았습니다. 당장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