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권의 영혼의창-행함의 딜레마
2014.01.19상세 본문
행함의 딜레마
행함은 참 소중합니다. 그렇지만 행함이 주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면 행함은 곧 율법주의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은혜의 특징은 자아를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주님의 깊은 은혜에 빠져 있는 상태에
서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선한 행함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은혜에 물든 사람은 자
신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자신이 선한 행함을 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합
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의 특징은 자아(self)에 몰두시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자아의 땀으로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행함
없는 사랑은 죽은 것이므로 행함으로 사랑을 나타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그것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창조된 행함이 아니라
면 행위는 곧 우리를 묶어버리고, 사랑마저 율법으로 변질되는 노예의 삶이 되고 맙
니다.
오늘날 세상을 둘러보면 그 어느 때보다 행함이 강조되는 현상 속에 우리는 놓여 있
습니다. 행함을 망각함으로써 행함이 이뤄지는 것에 놀라기보다는 행함을 척도처럼
강조하고 몰두하듯이 의식함으로써 행함이 믿음과 지식을 삼키고 그 위에 빛나는 기
념비를 우뚝 세우고 있습니다. 기독교 말고 다른 종교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행함은
믿음을 넘어 구원의 척도가 되어 버린 곳도 흔해졌습니다. 이런 행함 강조의 시류 속
에서 우리는 왜 공허함과 묶임이 심화되는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행함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말뜻은 ‘아는 것은 아
는 것’이고, 그 이후에는 행함을 내 의지로 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
는 것 자체가 행함과 동일시된다는 것입니다.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것은 그래서 ‘자
연스럽다’는 의미에서 열매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6장 29절에서 어떤 것이
참된 행함인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
의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동일시한 것입니다.
주님은 행함의 이면에 들어있는 ‘동기’를 항상 보셨습니다. 여기에 은혜가 밀어내지
않는 행함의 결정적인 딜레마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남자A은 화대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남자B는 화대를 지불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 율법은 사정이 어떠하든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은 남자A을 의롭다고 합니
다. 그러나 동기를 꿰뚫어보시는 하나님께는 남자A와 남자B는 동일하게 의롭지 못
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자신은 남자C에 속한
다면서 의로움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남자C의 깊은 동기를 들여다보면 사실은 음욕
은 있으나 사회적 처벌이 두려워 부정을 자제한 것입니다. 행함을 강조하여 행함으
로 급히 달려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랑을 보여
야한다는 강박적 생각 때문에 수도 없는 이기적 동기를 가린 채 사랑의 행함을 실천
했습니다.
여기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누구 못지않게 사랑의 행함을 귀하게 생각합
니다. 하지만 저는 그 행함이 공허한 것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를 아는 친밀함으로부
터 성령이 친히 창조해내신 행함이 되기를 무엇보다 바랄 뿐입니다. 영적성숙은 그
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창조해낸 자연스러운 것일
때에만 우리는 그 행함에 대해 우리의 자랑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남의
행함에 대해 비판하지 않게 됩니다. 부지불식간에 사랑을 위해 기쁨으로 생명까지
바치게 됩니다. 복음의 능력은 이렇게까지 강력한 것입니다. 은혜의 능력이 우리의
동기와 의지를 삼켜버리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날마다 더욱 알아가고(에베소서 4:13),
믿는 자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있는(로마서 6:11) 자가 되
었음을 순간순간마다 깨달아, 성령에 의해 선하게 창조된 행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차명권 전도사(온누리교회, HEART min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