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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권의 영혼의창-7번방의 선물

201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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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방의 선물

 

아침에 눈을 뜨는 많은 사람에게 부표처럼 떠오르는 공통된 생각이 있습니다. 그건

"나는 바르게 살고 있는가?"라는 의구심입니다. 이런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하루

가 시작됩니다. 일종의 합리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삶을 다독거립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임에 가니까, 오늘 나는 이런 선한 일을 할 거니까, 오늘 나는 좋은

학교 또는 좋은 직장에 출근하니까, 오늘 나는 많은 기도와 선교를 할 것이기에, 나

는 그 사람보다는 그래도 나은 상태이기 때문에 나는 바르게 살고 있는 것이라며 영

혼의 불안을 달래며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법원의 갑작스런 통고를 받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거나, 병과 가난이

불현듯 찾아오거나, 성적이 떨어지게 되면 그동안 안식을 주었던 생각들이 순식간에

유리처럼 깨져버리고 내 삶은 바르지 않은 삶으로 퇴보하고 맙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순간에조차도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고 바르게 채색해 줄 어떤 명분들을 찾고 만

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이런 명분과 정당화과정을 찾는데 실패한 사람들이, 그리고

어린 학생들이 자책과 두려움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혹은 자살이라는 방법

을 가지고 '명분'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정의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정죄감

에서 벗어나기 위해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포기하고, 포기해도 되는 것을 부여

잡는 등 자신의 삶을 얼마나 학대해 왔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내면 깊이 요동치고 있는 정의의 문제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근래 강하게 회자되었지만 그 역사적 뿌리는 아담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힐링과 치유도 이 문제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지적장애인 이용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7번방의 선물'에 나

오는 이런 대사가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 일

반적으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지 '정의'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한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도 지적장애인 이용구가 유아를 성폭행, 살

인하지 않았다는 무죄선고가 내려진 뒤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정의는 이처럼 죄가

있는 자에게는 혹독하고, 죄가 없는 자에게는 당연한 무죄를 선고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정의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선언

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제 아무리 엄격한 정의의 측량줄을 들이

대어도 믿는 자들은 절대적인 무죄를 선고 받게 되었습니다. 믿는 자들이 죄를 짓는

다고 죄인으로 드러나거나 정의에서 퇴보하여 다시 죽어버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정의의 관

점에서도 믿는 자들은 바른 자로, 의인으로 담대히 판단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태어

나면서 죽은 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형식으로 전혀 다른 의인으로 살

아난다는 것입니다. 뭔가를 잘못했다고, 환경이 바뀐다고 브랜드뉴(Brand New)한

새 피조물이 다시 죽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율법의 옛 남편에게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정의의 기준에 맞추려는 다른 모든 시도는 터진 웅덩이처럼 공허하고 변하기 쉽습니

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자들에게 완전한, 정말 완전한 의로움을 부여해주

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다른 것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

떠한 상황 가운데서 눈을 뜨든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인드 콘트롤도 아니고 자기 체면도 아닙니다.

그것이 믿는 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있는 법적 상태이고 진리

입니다. 무엇보다 믿는 자들은 이 안식으로 먼저 들어가기를 힘써야합니다.

그분의 자녀들에게 오늘도 주님께서 선하심으로 말씀하십니다. "정의의 이름으로도

나는 너를 용서하노라."

 

/차명권 전도사(온누리교회, HEART min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