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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권의 영혼의창-아프로디테와 예수

201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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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디테와 예수

 

얼마 전 말리부를 지나다가 게티 빌라(Getty Villa)를 방문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유적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폴게티가 석유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으로 세운 박물관인데, 유적지와 같은 모양으로 정원을 만들고 그들의 허

브식물까지 심어 박물관은 입구부터 신비한 향기에 취해 있었습니다.

수많은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미의 상징이 된 아프로디테의 조각상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작은 아프로디테로부터 거대한 아프로디테까지 다양한 아프로디테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

어 당시 고대인들의 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많은 사람들

이 그 아프로디테를 보려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프로디테는 많은 경우 뱀과 어우러져 있습니다. 아프로디테의 머리 혹은 팔, 다리 등 뱀은 늘 아프로디

테 가까이 위치해 있습니다. 뱀이 남성성을 상징한다는 문화적 해석이 있지만, 문명이 창조해낸 미 개념의 극치

에 뱀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비너스로도 알려져 있는 아프로디테는 미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분

쟁과 미움과 전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트로이전쟁 역시 아프로디테를 두고 일어난 전쟁이었지요. 이처럼 인간

이 창조해낸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뱀의 속성처럼 인간을 배반하는 불완전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뱀으로부터 발원하고 지지된 것이라면 반드시 인간을 배반하고 인간을

파괴하고 말 것입니다.

아프로디테의 팔에 감긴 뱀은 현재 우리들이 의학분야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뱀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앰뷸

런스 같은 곳에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뱀의 등장으로 인간이 타락하고, 그 타락으로 인해 인간에게

질병이라는 것이 스며들어 왔는데, 인간을 치료하고 고치는 의학의 상징에 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어떤 면에

서 모순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얼핏 아름답게 보이는 아프로디테의 미가 궁극적으로 인간을 허망한 곳으로 이끌고 가는 반면 가장 저주스러운

한 장면이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저주입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가장 아

름답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다 합쳐도 십자가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하

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

가에서 맞으시고 죽으심으로 인간이 죽음에서 해방되고 모든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나음을 입는 은혜가 역사 속

으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

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요한복음 3장 14~15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뱀의 죽음과 연관시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모습은 뱀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순간만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모두 짊어지시어 뱀처럼 저주를

받으셨고, 예수님의 죽음은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의 패배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뱀이 살아 있는 한 인간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아프로디테는 결국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뱀

처럼 저주 받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인간을 생명으로 이끌며 우리들에게 신비한 기쁨과 즐거

움을 넘치게 할 것입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

서.”(시편 90:14) 비록 모자라고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뱀을 이기신 예수님은 자녀들의 삶을 반드시 선으로 이

끌고 가십니다.

광야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매달아 올린 뱀을 볼 때 살아난 것처럼(민수기 21장)

인간의 아프로디테를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에서 뱀처럼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때 인간은 살

아납니다. 민수기 21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불뱀을 바라본 것은 히브리어로 ‘히비엣’이라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

다. 이것은 ‘유심히 주의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일을 행하신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그 예수님을 내 인생의 배 위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뱀처럼 저주 받으셨던 예수님은 이제 눈부신 영광을 입고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 빛나는 아름다움은 어떠한

예술작품으로도, 어떤 언어로도 표현해낼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은 그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In Christ를 140회 이상 사용하면서 믿는 자들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

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실 때 예전에는 뱀처럼 보았지만 지금은 예수님 안

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성도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럽다는 생각이 듭니까. 거짓입니다. 하잘 것 없어 죽고 싶습니까. 거짓입니다. 죄 많아 용서 못 받을 것 같습니

까. 거짓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더해야 더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합니까. 거짓입니다. 희망은 없습니까. 거짓입니

다. 복음은 믿는 그 순간 당신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당신이 흠 없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음을 밝히

보여줍니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믿음, 예수님 안에서 정죄함 없이 아름답게 되었다는 고백을 통해 당신은 예수

님처럼 되어져 갈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이뤄지는 기독교의 초월적인 능력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프로디테를 찾아 여기저기를 서성댑니다.

 

/차명권 전도사(온누리교회, HEART min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