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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컬러의 충돌

2014.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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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충돌 / 용우

 

 어제 저녁, 엘에이 한인타운에서 있었던 4.29 폭동 2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신축건물인 마당 몰의 중앙 홀

에서 신 영성 총영사와 버나드 팍스 시의원의 개회사를 듣고, 4층 CGV극장으로 올라가 [Clash of Colors] 라는

다큐영화를 관람했다.

 방화와 약탈 장면 사이에 대학교수, 언론인, 사회평론가와 폭동현장을 취재했던 기자 등 다양한 인사들과의 인

터뷰로 엮어진 기록영화이다. 작년 폭동 기념일에도 엠팍4 극장(지금은 휴관)에서 관람했는데, 이번에는 한인타

운 선거구 단일화 운동까지 새롭게 첨가하고 한글자막까지 넣어 1세와 2세가 함께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4.29 폭동다큐멘터리 영상물을 만든 사람은 데이빗 김이라는 변호사이다. 상영시간 두 시간분량의 기록영화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시간과 인력, 그리고 상당한 재정이 소요되었을 터이다. 스스로를 희

생하여 한인컴뮤니티를 지켜낸다는 투철한 사명감과 의지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사

람이 있어 세상에 희망을 품고, 사회정의가 실현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폭동의 발화지점인 사우스 엘에이의 교차로 중앙에서 일단의 흑인들이 백인 트럭운전수를 끌어내려 마구잡이

로 폭행한다. 대여섯 명의 백인 경찰들이 흑인 로드니킹을 둘러싸고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흉기로 무장한 폭도

들이 닫힌 건물을 부수고, 불 지르고, 약탈한다. 상공에서 촬영한 엘에이 시내가 대로변을 따라 꼬리를 물고 벌겋

게 타오르고 있다.

 문득 화면이 흐려진다. 어떤 가게 안에서 덩치 큰 흑인 소녀와 동양여인이 드잡이를 하고 있다.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소다박스 같은 것을 빼앗거나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짓을 하다가 대뜸 한쪽이 팔을 뻗어 상대의 얼굴을 가

격한다. 펀치를 맞고 카운터 아래로 넘어졌던 동양여인이 금세 일어났는데 손에 무엇인가가 들려있었다. 여인이

흑인 소녀를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흑인 소녀가 풀썩 쓰러졌다.

다시 화면이 밝아진다. 세 명의 백인 경찰관들이 법정에서 무죄선고를 받는다. 흑인 소녀를 총격으로 숨지게 한

동양 여인 역시 5년 보호관찰의 가벼운 형량을 선고 받는다.

 건물의 지붕으로 불길이 치솟는다. 미처 불붙지 않은 건물 앞에는 물건을 훔치려는 이방민족들이 개미떼처럼

둘러서 있다.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폭도들이 닫힌 셔터 문을 해머로 찍어 넘긴다. 기다리고 있던 약탈자들이 우

르르 몰려 들어간다. 어른, 아이, 청년, 여자, 노인 할 것 없이 음식물과 옷가지와 가전제품과 알 수 없는 박스들

을 한 아름씩 들쳐 안고 희희낙락하며 제 갈 곳으로 흩어져 간다.

 화면이 바뀐다. 손에 손에 성조기와 태극기와 ‘WE WANT PEACE’ ‘WE ARE VICTIM ..WAS IN    JUSTICE’ 따

위 각양각색의 프랭카드를 펼쳐든 한인들이 올림픽가를 따라 행진하고 있다. 아드모어 공원에서 출발하여 웨스

턴애비뉴, 베버리블러버드를 거쳐 벌몬트로 돌아오는 장정이다. 어른, 아이, 여자, 남자, 청년, 노인 등, 한인동포

십만여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미주동포 최초의 평화대행진이다.

 나도 당연히 그 평화행진에 참여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K형을 비롯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였다. 다리가 아픈

나는 친구들의 권유로 웨스턴과 3가에서 아쉽게도 행진을 마쳐야 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 평화대행진이 지나는

길가 곳곳에서 시원한 물병을 나누어주던 동포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시커멓게 불타버린 가게 앞에 서서 자

신은 그 행렬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열렬한 박수와 환호와 물 한 병으로 뜨거운 응원을 보내던 동포들의 간절한

눈빛을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겪은 4.29 폭동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그때 멜로스와 플리머스가 만나는 곳에 살았다. 파라마운트 영화사

바로 앞이었다. 오래된 4유닛 아파트였는데 나는 그 집에서 막 이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5번과 605프리웨이가

만나는 놀웍에 방 두 개짜리 하우스를 사서 폭동 며칠 전에 에스크로가 끝난 상태였다. 얘기를 하자면 길지만, 어

쨌든 미국에서 처음 마련한 그 집을 일 년 후에 포클로즈 하고 말았다. 물론 폭동의 여파로 인해서였다.

 나 개인은 물론 한인 사회 전체가 그 폭동으로 인해 값진 교훈을 얻고 한층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나

위가 없다.

 

2012.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