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건너 오두막-양보 할 수 없는 것
2014.01.26상세 본문
양보 할 수 없는 것 / 이 용우
저녁 식사자리에서 아내가 이번 주일 오후에 둘째 처남 네가 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우리의 인컴텍스 서류를 가
지고 올 겸해서 오랜만에 내외가 함께 방문을 한다는 것이었다. 카운티공무원인 처남댁이 회계사 자격증을 보유
하고 있어서 우리 부부의 인컴텍스를 도와주고 있기에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허지만 그 말을 듣
는 순간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처남 내외의 방문에는 당연히 식사를 함께 한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일 텐데, 아
내가 우리끼리 한 약속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밸런타인 행사를 처남 네와 함께 하게 되네."
내 말에 아내는 응? 하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아이고, 이놈의 정신머리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아내
는 금시 얼굴을 바꾸더니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않되, 그럴 수는 없지, 음… 할 수 없어, 좀 피곤하더라도 밸런타인데이 당일 날 미미로 가는 거야, 다른 건 몰라
도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요."
올 해의 밸런타인데이가 주 중인 화요일이어서 일요일 저녁으로 당기자고 서로 말해놓고도 아내가 그 것을 깜빡
잊고, 처남 네의 방문을 겹치게 했던 것이다.
내가 해마다 밸런타인데이에 갖는 우리부부만의 저녁시간을 궂이 '행사' 라는 이름으로 거창하게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결혼 전 아내를 알게 된지 삼사 개월쯤 되었을 무렵에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왔다. 나는 고민이 되었다. 젊은이들
처럼 무슨 이벤트를 한다거나 아니면 어떤 고백 따위 때문에서가 아니다. 밸런타인데이라는 것을 모른 척해버리
기도 뭣하고, 무엇을 하자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앞서간다는 느낌을 줄 것 같아서 하는 고민이었다.
며칠 그렇게 고민을 했는데 결론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기간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오다가다
그냥 알게 된 사이가 아니라 윗사람들의 소개에 의한 만남이고, 또 상대를 알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다는 생각
에서였다. 나는 그녀에게 짤막한 이메일을 띄웠다.
-혹시 2월 14일 저녁시간이 비었으면 저와 같이 밥이나 먹을래요? –
그랬더니 당장 예스, 라는 답장이 날아왔다. 마침 그 해의 밸런타인데이는 토요일이었다.
만남의 장소는 언제나 아내 쪽에서 정하기 마련이었다. 여성에게 먼 길을 운전하여 LA까지 오라고 할 수 없기에
언제나 내가 오렌지카운티로 내려왔다.
아내가 정한 첫 번째 밸런타인데이의 만남 장소는 레이크 포레스트에 있는 '미미카페' 였다. 유럽피안 스타일의
외관에 고풍스러운 실내장식이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곳이었다. 망설임 끝에 타운 꽃집에서 사가지고 온 장미꽃
다발은 트렁크에 둔 채였다.
그날 메인 디쉬로는 스테크를 시켰는데 내가 밸런타인데이에 와인 한 잔 없어서야 되겠느냐며 미미카페의 하우
스 와인을 두 잔 주문했다. 처음에 아내는 그 때까지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며 주저했는데, 나의 건배 제의로
한 모금 마셔보더니 의외로 너무 맛있다며 감탄을 쏟아내었다.
"예수님이 왜 포도주를 만드셨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가끔 한 잔정도 마시면 건강에도 좋고 기분전환에도 그만
입니다."
내 말에 아내는 달덩이 같은 얼굴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 리가 있네요, 정말 포도주가 이렇게 맛있는 줄은 몰랐어요."
포도주가 맛있는 바람에 우리가 맞은 첫 밸런타인데이의 밤은 아주 화기애애하고 즐겁게 흘러갔다. 나중에 주차
장에서 헤어질 때는 밸런타인데이를 핑계로 허깅까지도 감행했다. 사귐의 진도를 한층 앞당기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그 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급속히 가까워진 우리는 그로부터 6개월 후인 8월에 결혼
을 결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살림을 합친 후로도 밸런타인데이가 돌아오면 우리 부부는 어김없이 레이크포레스트의 미미카페를 찾아갔다.
어디나 따라다니는 그린이도 그 날만큼은 예외이다. 오직 우리 부부만의 만찬을 베풀고 즐기는 날이다.
아내가 밸런타인데이 '행사'를 기필코 사수하려는 데에는 이렇게 충분한 배경이 깔려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되도록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 삶을 여유롭게 하고 편하게 하는 지름길이라지만, 가끔은 아내의 고집처럼
양보할 수 없는 것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잠시나마 잡다한 일상으로부터 스스로를 피난시키고, 날선
신경을 세탁하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탈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이다.
주 중의 밸런타인데이가 느긋한 만찬을 즐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일상의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서라도
아내의 뜻에 따라 '미미카페'로 달려가는 것이야 말로 내가 수행해야할 마땅한 과제이겠다. 그렇게 또 포도주잔
을 앞에 두고 행복해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올해의 '행사'를 무난하게 치러내야 하는 것이다.
2012.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