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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나 사랑해?

201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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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랑해?/ 홍순복

 

 그린은 시도 때도 없이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응 하고 대답하면 내 음성의 높낮이에 따라 사랑의 크기가 다르다고 생

각되는지 또 다시 물어온다. 그래, 땅만큼, 하늘만큼 사랑해. 네댓 살 계집아이처럼 물을 때 마다 대답을 한다. 나도 가끔 아이

에게 너 나 사랑하니? 하고 물으면 그린은 그럼, 하며 아주 과장되게 큰 소리로 답한다.

 내년이면 대학생이 될 그린의 사랑을 확인하는 횟수는 점점 늘어만 간다. 나는 딸에게 엄마가 사랑하는 것을 못 믿느냐고, 하

루에도 몇 번씩 묻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오 년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에스크로관계로 입주 시간이 촉박해서 아래층만 겨우 페인트칠을 하고 위층은 페인트는

물론 카펫도 갈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카펫은 아직 쓸 만하지만 딸의 방벽이 너무 지저분했다. 변화주기를 좋아하는 딸은 온갖

것을 벽에 붙이고 떼는 일을 반복해 흠집 난 곳이 볼썽사납게 많았다.

 딸의 방 페인트를 새로 칠해주고 싶었다. 우선 아래층 작은 화장실부터 시작했다. 오래전에 페인트 헬퍼를 한 적이 있어 붓으

로 타치업하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화장실 페인트는 전에 쓰고 남은 노란색으로 칠했다.

 딸의 방은 순장님댁에서 얻어온 핑크색 페인트를 칠하기로 했다. 그런데 짐이 많아 그걸 한쪽으로 끄집어내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다. 흰 티셔츠에 모자, 마스크와 안경까지 쓰고 일을 시작했다. 수성페인트라 냄새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우선 창문과 손잡이 등을 테이프와 함께 신문지와 비닐로 가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먼저 구멍 난 곳을 메워야 했다. 높은 곳은

사다리를 놓고 칠했다. 도울 것이 없냐고 딸도 자주 들여다보았다. 오히려 방해가 되니까 괜찮다고 말했다.

 하루 온종일 걸려 겨우 딸의 방 페인트칠을 끝냈다. 뾰족지붕의 높은 천장은 칠하지 못하고 세 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

는데 까지 칠을 했다. 이왕 내친김에 카펫 물청소도 했다. 새방이 되었다.

 그린도 신이 나는지 군소리 없이 자기 방 정리를 잘했다.

 칠을 한 다음날 나는 딸의 방에 들어가 봤다. 정돈이 잘되어있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취향도 다른지 열광하던 아이돌 가수

사진도 사라졌다. 틈틈이 그린 그림 두 점과 몇 개 장식을 제외하고 벽을 깨끗한 빈 공간으로 남겨 놓았다.

 딸은 램프대신 크리스마스라이트를 사면에 두르고 별밤을 연상하듯 음악을 듣곤 했다. 꼭 여름날 시골 평상에 누워 하늘의 별

을 세며 별자리를 찾던 것처럼 별밤을 만들었다.

그런데 책상에 늘 있던 박스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다 둔 걸까? 옷장을 열어보니 그 안에 있었다. 아이의 방에 들어설 때

마다 보이던 아이 생모와 제 아빠가 함께 웃고 있는 사진 앞에 아기 때의 자기 사진을 붙여놓았던 상자였다. 그린은 그것을 꽤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보는지 꼭 눈높이에 맞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왜 이제는 옷장 속 높은 선

반위에 둔 걸까?

 언젠가 놀러온 문우 한사람이 딸의 방을 둘러보고는, 남편에게 ‘ 사진은 치워 줘야하는 게 아닌가요?‘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남편은 아직 치우라고 하기엔 어리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사실 그 사진은 그린이가 자기책상에 놓기 전에 제 아빠에

게 허락을 받았다.

 나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가끔 딸의 방을 들어갈 때면 그 사진을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유쾌하진 않았다.

 나는 옷장 문을 닫기 전에 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 미안해요. 그린이가 이젠 엄마를 여기에 모셨네요. 요즘엔 살 뺀다고 과일과 야채를 잘 먹어요. 몸무게가 조금 빠져서 제

법 옷맵시가 나요. 늘 감기를 달고 살아 기관지염이 있었는데 이젠 다 나았어요. 그리고 아주 예뻐졌어요. 이곳이 답답하겠지

만 다시 그린이가 찾을 때까지 참고 있어요. 안녕!’

 나는 그렇게 혼자 웅얼거리다 옷장 문을 닫았다. 들을 수 없는 그녀에게 꽤나 생색을 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잠시 얼굴이 붉어

졌다.

 그린은 왜 날마다 사랑을 확인하는 걸까. 어떤 갈증이 그 애 안에 있는 걸까. 아이는 내게 뭔가를 원할 때면 언제나, ‘엄마,

사랑하면 그렇게 해줘,’ 라고 말한다. 그런 아이가 페인트로 새롭게 꾸며진 자신의 방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엄마, 고마워,

사랑해,’ 를 연발했다. 나도 그린이를 안아주며 ‘그래, 엄마도 너를 사랑해.’ 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 엄마 사진박스를 옷장 속으로 옮긴 이유가 궁금하다. 어쩌면 이제는 나에게, ‘ 나 사랑해?’라는 질

문을 더 이상 던지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