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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칼럼

엠마오로 가지 마십시오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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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의 두 제자

어릴적 교회에서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가 있었습니다.
비교적 쉬운 기타 코드로 구성된 이 곡은 두 사람이 화음을 맞추기에 손색없는 곡으로 교회 찬송 경연대회에 자주 등장했던 곡이었습니다.
‘엠마로로 가는 두 제자’로 알려진 이곡의 본래 제목은 ‘엠마오의 두 제자’ 이고 작곡자는 한국 교회음악의 거장으로 알려진 ‘본향을 향하네’의 고)김두완 박사였습니다.

어릴 때는 음을 뽐내느라 의미도 모른 채 불렀던 이 곡은 성장하면서 종종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엠마오는 어디이며 두 제자는 왜 그곳으로 가던 중이었을까?
작곡자는 왜 그들이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다 표현했을까?

노래는 개인의 간증이든, 성경의 이야기든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엠마오는 성경에 나오는 지명(地名)이고 그 길을 가고 있던 사람들은 실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이며 왜 엠마오로 가는 중이었을까

두 사람이 엠마로로 가던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부활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이 따르던 스승이 무참히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부활을 여러차례 이야기 하셨고 유대인들 조차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무덤앞에 돌문을 막았건만 정작 예수님의 제자였던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중 한명의 이름은 글로바이고 다른 한명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글로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돌아가실 때 십자가 아래 있었던 여러 마리아 중 한명의 남편과 같은 이름이지만 동일 인물인지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알던 제자들 그룹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다른 제자들도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을 뿐 아니라 자주 언급되지도 않고 자주 나오지도 않는 예수의 제자들도 다 흩어진 것입니다..

이들이 엠마오로 가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오해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에게 그들은 예수신줄 알지 못하고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분으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로지 정치적인 예수로만 그분을 이해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정치가는 힘을 잃은 순간 모든 것을 잃습니다. 아무도 그들곁에 있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며 엠마오로 떠났던 것입니다.

가서는 안될 곳 엠마오
성경에 등장하는 곳 엠마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60스타디온 (약 7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위치는 불명확합니다.
엠마오는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의 고향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희망을 갖고 있던 대상이 사라지자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 이들은 예수의 부활을 알지 못했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난주에 부활절을 보낸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수십번의 부활절을 보내면서 이 두 사람 보다 더 빨리 엠마오로 가곤 합니다.
여전한 걱정과 절망, 그리고 불안과 초조로 가득한 삶으로 여전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빨리..
부활을 몰랐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알고 부활절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인줄 아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며 절기행사를 치루듯 아무 감동과 감사 없이 그날을 보내곤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누구보다 더 빨리 엠마오로 향하는 내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치 예수의 부활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려면,
예수남께서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과 예언자들의 모든 예언이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지 다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을 때 그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무턱대고 읽는 것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난 주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모르는 분의 전화는 온통 질문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질문에 대한 답을 서로 찾아가며 내린 결론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집회금지명령에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예수의 보혈이 나를 덮고(cover)있기 때문에 나는 안전하다고 말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발언을 했던 목사는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보혈이 나를 덮는다고 표현한 그분은 마치 마블 영화처럼 어떤 외부의 공격으로 부터 나를 지켜주는 쉴드로 보혈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은 말 그대로 혈액입니다. 혈액은 뇌에 산소를 공급하고 심장을 뛰게 합니다. 보이지 않게 일하며 서로 역할을 감당하도록 돕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내 안에 흐른다는 것은 내 몸에는 코카콜라가 흐른다고 말하는 회사의 CEO보다 더 엄청난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생명이요, 가치관이요 인격이요 삶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보혈을 흘려 주시고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피로 (수혈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삶입니다.
다시 예전의 삶으로, 예전의 엠마오로 돌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던 길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예수님의 탄생은 매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도 매일입니다. 부활하신 영광도 매일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절기에, 명절에 가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예전의 고통과 예전의 걱정 근심, 예전의 소망이 없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가고 싶습니다.

이번주가 바로 그 시작입니다.
엠마오로 가지 마십시오. 다시 시작하십시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엠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