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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두 세대

201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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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대/ 홍순복

 

  퇴근 후 현관문을 들어서니 그린이는 리빙룸의 TV 앞에 있었다. 또 TV만 보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

왔지만 가만히 눌러 앉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도 모르는지 이층에 있던 구찌녀석이 목줄에 달린 네

임텍을 딸랑거리며 내려오자 딸아이는 그제야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 하이, 엄마."

 다른 때 같으면 달려 나와 어깨를 껴안던지 목에 매달리던지 했을 아이가 시무룩하게 화면만 보고 있었

다.

 " 왜 그래, 엄마가 왔는데 반가워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며 가까이 다가서보니 그린의 눈언저리가 촉촉해져 있었다. 대답 없이 TV에만 눈을 고정시

킨 아이를 따라 나도 눈을 돌렸다. 화면 속에 그린이 만한 아이가 미혼모가 된 사연을 방영하고 있었다.

'닥터 필'이란 프로였다.

 " 엄마, 저 아이 너무 불쌍해. 나 같은 아이가 벌써 엄마가 되었어."

 전날 그린이 처음으로 생리를 시작했다. 왜 자기는 친구들처럼 생리가 없느냐고 불평을 하더니 막상 시

작을 하니까 왜 여자만 해야 하는지 불공평하다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나는 이참에 성교육을 한답시고 아이와 마주 앉았다.

 " 그린아, 이제 너도 여자가 되는 거야."

 " 그럼 내가 여자지 남자야?"

 " 아니 이제는 아기도 낳을 수 있는 진짜 여자가 된다는 말이야. 생리를 시작하면 몸에 여러 가지 변화

도 생기고, 티브이에서 본 아이처럼 잘못하면 미혼모가 되어서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단 말이야."

 나는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이해가 쉬울까 하는 생각에 우선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것만

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한마디 덧붙였다.

 " 너의 순결은 이다음에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것도 결혼과 함께 선물하는 거야. 남자도 마찬가지

야. 크리스천은 더욱 그래야 해."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시집간 큰언니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마침 그때 나는 처음으로 달거리

를 시작했다. 다행히 언니가 그것을 발견했고 처음으로 나는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때 까지 그것이 무

엇인지 왜 하는 건지 아무도 내게 일러준 적이 없었다. 그저 아는 것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우리들 세대가 다 그랬듯이 중고등학교 등하교 때에 만원 버스 속에 콩나물처럼 빼곡히

끼여 다니던 시절을 기억한다. 얼마나 무지했으면 남자와 옆에 닿아도 임신을 하는 것 아닐까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아이가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으면 모든 어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배꼽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자라온 세대이다. 자식을 아홉이나 낳은 나의 엄마는 여자가 언제쯤 되

면 생리라는 것을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할머니의 세대도 그랬기에 대대로 이어져 온 건지 모른다.

말할 수 없는 금기 사항처럼 여기며 스스로 때가 되면 알아서 터득하려니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 딸아이와 단둘이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린이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혼자서 키득거리며

웃음을 참느라 밥도 제대로 먹질 못했다.

 " 너, 왜 그래 엄마 흉보니?"

 " 아니야,"

 내가 화가 난 듯하자 아이는 자기가 웃는 이유를 말했다. 자기 학교에 세계사를 가르치는 멋쟁이 남자

선생님이 있다고 했다. 여자 아이들이 그의 강의에 홀딱 반할 정도로 재미있다고 했다. 선생님은 세계

이곳저곳을 눈으로 보듯이 세밀하게 묘사한다고 했다. 점심시간에 선생님은 농구를 한단다. 그 선생님

이 어제 점심 식사 후 농구를 하고 운동복을 입은 채 수업을 했다는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여자아이들

에게는 선생님의 꽉 조이는 반바지 차림이 너무 파격적이었다고 했다. 그때 조숙하고 괴짜인 앞줄의 여

자아이가 뒤를 향해 양손으로 손나팔을 만들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 했다.

' 무쵸그란데"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채고 교실이 떠나갈듯 깔깔거렸다고 했다. 선생

님은 무안했던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서둘러 수업을 단축하고 교실을 나가 버렸다는 말이었다. 그

리고 그 선생님이 오늘은 농구도 하지 않고 수업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요즘의 아이들은 나의 유년기와는 달리 인터넷을 통해 습득하는 것이 많다. 그래서 물가에 놓아둔 아이

처럼 염려가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가 위험한 사이트에 접속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가시질

않는다. 모든 것에 궁금한 것이 많은 그린은 내게 물어오는 것이 많다. 때론 아직 몰라도 될 것을 묻기도

하지만 그런 순진함과 솔직함이 있다는데 염려와 함께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린이 초경을 치룬 것에 비해 나는 얼마 전부터 얼굴이 화끈거리고 시도 때도 없이 상체가 땀으로 흠

뻑 젖는 폐경기에 들어섰다. 끈적한 땀에 젖어 잠이 깨는 새벽녘이면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빨리 아침

이 되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한세대는 문이 열리고 한세대는 닫히고 있다. 이제 딸아이가 살아가야 할 여자의 일생, 아내로서 어머

니로서 신비하고 경이로운 미래를 근심어린 마음으로 상상해 본다. 초경의 놀라움을 넘어 성숙한 여인

으로 신앙인으로 살아가길 바라며 기도한다.

 

2011년 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