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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건너 오두막-굿바이 레베카

201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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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레베카/ 이용우

 

 지난 토요일 아침 새벽기도를 갔다 오는 길에 보니 단지 입구에 무빙세일 싸인이 붙어있었다. 어느 집

이 이사를 가나 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주차를 하는데 카폿 기둥에도 똑같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어느 집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광고하는걸 보니 처분할 물건이 꽤나 많은가보다고 생각하

며 역시 관심밖에 두었다.

 그런데 오후에 장모님 댁에 가려고 아내와 함께 주차장으로 나갔더니 옆집 잭네 식구들이 우리 카폿

옆자리에 좌판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네 주차자리에 거라지세일을 펼친 것이었다. 두 아이

를 키우는 집답게 바닥에 널리고 옷걸이에 걸린 물건들이 거의 아이들 옷가지와 장난감 따위들이었

다.

 "아니, 당신네가 이사하는 거예요?"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예스."

 잭이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 어디로요?"

 "벤츄라."

 "언제요?"

 "넥스트 윜."

" 넥스트 윜? 오마이 갓, 왜 이사를 갑니까?"

" 네, 저와 아내가 함께 벤츄라에 직장을 얻었어요. 그래서…"

성격이 급한 아내가 연달아 질문을 퍼붓자 평소에도 과묵한 성격의 잭이 어깨를 들었다 놓으며 느리

게 대답했다. 엔지니어 인 잭이 일 년 넘도록 집에서 빈둥거리던 것을 생각하면 벤츄라로 이사를 가더

라도 직장을 잡은 것이 다행이련만 선뜻 축하의 말이 나오질 않았다.

"오, 그래요? 그럼 여기 콘도는 팔던지 세를 놓던지 해야겠군요?"

잭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지금 살고 있는 콘도를 5년 전에 사십 이 만 불에 샀는데 지금 마켓 시세가

삼십 만 불 아래로 떨어져서 팔지는 못하고 렌트를 놓아야겠고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아내에게 얼른 가자는 눈짓을 했다. 유쾌할 리 없는 이야기를 길게 이어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

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고 개인의 사생활을 지극히 존중하는 서구인처럼, 거라

지세일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때 발음도 채 여물지 않은 가녀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바이~"

 돌아보니 잭의 아내 엘리스의 팔에 안긴 한 살 반짜리 레베카가 흔들던 손을 딱 멈추어 든 채 방그레

웃고 있었다. 옆집이 이사한다는 사실에 얼이 빠져서 엄마 팔에 안겨 있는 아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다. 얼른 바이~ 하며 손을 들었다.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제 엄마가 바이, 하며 다시 한 번 인사하기를

재촉했지만 레베카는 입도 손도 움직임을 멈춘 채 방그레 웃기만 했다. 아, 그렇지. 나는 살짝 돌아서

서 한 발짝을 내딛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바이, 하는 레베카의 여린 음성이 들렸다. 얼른 돌아섰다. 레

베카가 또 흔들던 손과 입을 딱 멈추고 방그레 웃기만 한다. '바이' 란 상대방이 등을 보이고 돌아섰을

때 하는 것이라고 그 조그만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하하!"

 우리 부부와 잭네 식구는 레베카로 인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콘도미니엄 단지를 꼬불꼬불 돌며 모든 집의 뒤뜰에 물길을 대는 이 레이크 커뮤니티로 이사를 왔을

때 잭의 아내 엘리스는 만삭의 산모였다. 엘리스는 부른 배를 안고도 직장 잃은 남편을 대신해 일을 나

가느라 힘겨워했다.

-It's a girl-

-Name : Rebecca-

어느 날 퇴근길에 잭네 집 앞 작은 꽃밭 속에 핑크 풍선과 함께 그런 팻말이 꽂혀 있었다. 여자 아이라

는 것과 이름 외에도 태어난 날짜와 몸무게까지 새 아이에 대한 신상정보가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여보, 옆집 꽃밭에 싸인 봤어? 걸이래 걸! 아름은 레베카!"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내에게 물었다.

"그럼, 봤지. 첫 아이가 아들인데 딸을 낳았으니 얼마나 좋을까."

"이사 오자말자 옆집에 새 생명이 태어나니까 너무 기쁘다. 좋은 일이야, 그렇지? 길조가 분명하지?"

"정말 좋은 일이야. 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빨리 보고 싶네."

우리는 남의 일 같지 않게 흥분하고 기뻐했다.

그로부터 서너 주간쯤 지나 중무장을 하고 집을 나서는 유모차 속의 레베카를 우리는 처음으로 대면

하게 되었다. 태어 난지 채 한 달도 안된 아이인지라 작은 코가 양 볼따구니 사이에 묻히고, 눈두덩이

부숙 했지만, 제 부모를 닮아 금발에 핑크빛이 도는 하얀 살결이 전형적인 백인 아이의 모습이었다. 레

베카는 참으로 귀엽고 예쁜 애기였다.

"여보, 레베카네 이사 갔어?"

주차장의 옆자리가 며칠째 비어있었다는 생각에 저녁을 먹다 말고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그런가봐. 페티오의 파라솔이랑 테이블과 의자까지 다 가져갔어."

"정말? 어디 좀 가볼까."

어쩌다가 뒤뜰에서 마주치면 하이, 하고 인사만 나누던 레베카네 페티오를 처음으로 넘어가 보았다.

사방 15피트 정도의 작은 페티오에 방문 온 잭의 부모까지 가득 둘러앉아 웃음꽃을 피우던 자리가 화

분 몇 개만 뒹굴 뿐, 휑하니 비어 있었다.

뒷문의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리빙룸 벽에 별과 달, 해피 버스데이 따위의 모양과 글자들

이 형형색색으로 붙어있었다. 눈을 더욱 밀착시키고 살폈더니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 밑에 숟가락만한

바비 인형이 등을 보이고 엎어져 있었다. 나는 바비인형을 향해 레베카가 하듯 '바이' 하고 손을 흔들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