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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_ 임용성 담당목사

201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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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성 담당목사 칼럼]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온누리신문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가을 소풍을 10월 26일로 잡았다. 소풍. 그 시절을 살았던 어린이라면 예외 없는 설렘의 단어가 아니었던가?

일주일 전부터 밤잠을 설치며 준비한 소풍날 아침. 가난한 시절에 엄마가 싸주신 김밥과 병사이다 한 병, 그리고 삶은 계란에 나는 이미 세상을 다 가진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어린 동심에 비수를 꽂는 비보가 있었으니 바로 박정희대통령의 서거소식에 따른 소풍취소 소식이었다. 우리 3학년은 교실 뒤 연못에서 수양버들을 그늘삼아 눈물의 김밥과 아쉬움의 사이다로 가시지 않는 목을 축여야 했다.

그 슬픈 날 오후. 나는 평생을 잊지 못할 사건을 만나게 되었다. 점심이 지나 하교령이 있어서 삼삼오오 정문을 향해 가는데 무슨 큰 일이 났는지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던 것이다. 달려가 보니 요란한 구급차가 한 대 와 서 있었다. 그리고 아수라장이 된 사이로 우리 반 담임인 김영환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의 부축을 받으며 구급차에 타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의 오른쪽 다리는 찢겨져 피가 흥건하게 흘렀고 급하게 붕대를 감은 모습을 하고 차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생각하는 사이 김영환 선생님은 이렇게 외치셨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건은 이랬다. 우리학교 정문에는 잉어가 살 만큼 큰 연못이 있었고 초등학생이 보기에는 꽤 높은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다리 양쪽은 아래로 창끝 모양의 철근이 수도 없이 뾰족 모양을 하고 솟아있었다. 절대로 올라갈 생각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그런데 1학년 여자 아이가 어떻게 그 아래를 내려갔는지 연못에 내려갔다가 그만 빠져버린 것이었다. 우리담임 김영환 선생님이 다리 위를 가시다가 허우적대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고 지체 없이 다리위에서 뛰어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 급하게 뛰어내리셨는지 뾰족 창살에 자신의 허벅지가 찢겨져 나간 것이다. 나중에 나는 알게 되었는데 선생님의 허벅지는 15센치 이상 찢어졌다고 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자신의 허벅지가 뾰족 창살 걸려서 찢어나간 줄도 모르시고

 

아이를 다리위로 끌어올리셨던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잃으신 것이다. 그리고 가까스로 정신이든 선생님이 실려 가며 외치는 한 마디.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은 찢겨서 고통이 일고 있는 순간에도 자신을 걱정하기보다는 일면식도 없었던 이름 모를 제자를 걱정하는 그 한마디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 충격적이었다. 지금도 그 목소리는 또렷하다. 선생님은 한참동안 목발을 짚고 다니셨는데 아이인 내 눈으로 봐도 상남자중 상남자요. 멋쟁이고 참교사이고, 참리더로 보였다. 내 영혼에 깊은 도전과 삶의 방향성을 심어준 가장 유서 깊은 기억. 대통령 서거일에 벌어진 소풍 같은 에피소드.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이름 ‘김영환 선생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생각해본다.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서 인간으로 내려오실 때 계산기를 두드리셨을까? 성부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등 떠밀려서 내려오셨을까? 이 고비만 넘기면 영광의 자리에 오를 수 있고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케 되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이룰 야망을 가지고 자신을 내어 주셨을까?

 

나는 만 가지의 죄를 지었고, 여전히 내 나이만큼이나 고도로 숙성된 죄인임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버리려고 셈하여보신다면 만 가지는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버리지 못하시는 한 가지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인 것을…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이 땅에 어떤 것도 나 같은 죄인보다 소중하지 않다.

이 아이러니는 믿음으로만 이해되는 경이로운 아이러니임을 사랑의 확신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 영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우리가 한 익명의 영혼을 중보하고 섬기물어봐야할 소명 같은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