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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_ 임용성 담당목사

20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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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성 담당목사 칼럼]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 온누리신문

                 

너희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엄마와 아빠에게 주었던 기쁨은 이루말로 할 수가 없다. ‘우리를 향한 창조주의 마음이 이러시겠구나!’ 싶은 마음을 비롯해서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하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고, ‘아들의 고통을 헤아려 주세요’하는 성령님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그뿐이겠니? 너희들의 허우적대는 두 팔과 다리를 보고 있으면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인생의 시름과 무게가 어쩜 그렇게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던지 꼭 마법과 같더구나! 너희들의 거짓 없는 몸짓과 표정, 포동하고 보드라운 살결에 중독되어 세상 시름이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었다. 아빠는 그때가 몹시 그립구나!
아들들아 잦은 이사와 다른 환경에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니? 아빠는 그것이 가장 미안하다. 서울, 인천, 대전, 부천, 서산! 그뿐이겠니? 같은 도시 안에서도 반복된 이사와 이동, “이사 가기 싫은데… 친구는 또 어떻게 사귀지?”라며 반 친구들과 울며 헤어졌다고 망량한 눈을 내밀 때, “아빠! 왜 내가 여기 살아야 돼?”라고 차라리 큰 소리로 짜증이라도 내면 좋으련만 조용한 너희들은 체념하듯 아파하더라! 그게 참 미안했다.
‘목사와 아빠’라는 두 얼굴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었니? 더군다나 이렇게 작은 교회에 있는 너희들의 중압감과 시선을 나는 안다. 부족한 아빠의 시선이 너희들에게 결핍이 되었고 때론 과잉이 되었구나! 아빠도 세상과 교회 앞에서는 목사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염없이 약한 자녀란다. 아빠는 신통방통한 사람이 아니다. 정답을 알고 있다고 다 정답처럼 살지 못한다. 아빠도 몰래 눈물 흘리고, 갈등하고, 미래를 걱정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살얼음판을 걷듯이 인생을 걷는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삶의 소망되심을 알려주고 싶다.
아빠는 가식적인 문장으로 여러 말을 쏟아 놓아 너희 심경을 복잡하게 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오늘 너희들에게 두서가지만 당부하련다. ‘겸손해라!’ 그리고 ‘사람을 살피는 존재가 되라!’ 그리고 ‘유머 있는 사람이 되라!’ 딱 세 가지다.
아빠는 한 가지 꿈이 있다. 사람들이 아빠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한 사람’으로 기억하기를 바란다. 너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소망한다. 거기에 겸손이 있다. 겸손은 특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특권을 가지지 못해서 허우적대고 기고만장한다. 그러기에 교만은 결핍이다. 아들아! 너희의 겸손을 악용하는 자들을 불쌍히는 여기되 깊은 사귐을 가지지는 말아라. 너무 깊은 책임감에 건강을 해치지도 말아라. 너희의 겸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자들을 찾거든 너희는 더욱더 겸손해라! 품위와 진정성은 다르다. 교만한 자 앞에서 품위를 잃지 마라. 그리고 거룩하고 겸손한 자 앞에서 진정성을 잃지 마라! 네가 거룩하고 겸손한 자 앞에서 진정성을 잃어버린다면 너는 품위도 겸손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 가식이다.
교만은 거꾸로 흐르는 물과 같더구나! 그래서 썩고 냄새가 나는 것이 교만이다. 교만한 삶은 마치 하수구에 흐르는 물을 퍼다 올려 살아가는 것과 같다. 그러니 끝까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해라! 너의 인사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고 비굴해 하지 마라! 겸손은 비굴함과는 차원이 다른 영역이다.
아빠를 보아라! 내 세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 이렇게 훌륭한 교회, 이렇게 훌륭한 성도들과 목회자와 더불어 사역하고 있음을.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기쁨이다. “오직 하나님이 나의 삶의 인도자이십니다”라는 뼛속 깊은 고백의 결과란다. 그러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경외해라!
사랑하는 아들아! 사람들을 살피는 사람이 되라! 아빠는 너희들이 이어폰으로 귀를 막는 것보다 풀의 소리, 사람의 소리, 같이 뛰면서 심장의 소리를 교환하며 사는 것을 원한다. ‘나’라는 말보다 좋은 말은 ‘우리’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이것이 하나님의 다짐이다. 요셉도 술 맡은 관원장의 얼굴을 살피고 즉, 사람을 살피고 나서야 비로소 총리의 길이 열렸다. 이 하나님의 우리를 중요시 여기는 뜻을 어찌 거역하겠니? 유대인 출신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타인의 얼굴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그러니 기억하거라. ‘나’에게 집중하지 말고 ‘우리’에게 집중할 때 너의 길이 열릴 것이다.
또 아들아! 유머를 잃지 마라! 아빠가 집안에서도 계속해서 유머를 발굴하지 않더니? 웃는 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웃을 일이 없어서 웃지 못한다는 말은 패배자의 말이다. 웃을 일이 없어서 못 웃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웃을 생각이 없어서 못 웃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웃어라! 웃음은 창조정신에서 나온 것임을 잊지 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엄청나게 웃으셨단다. 사람들이 가볍게 본다고? 아마 부러운 것일 거다! 그러니 웃어라! 그리고 유머 있는 사람이 되어라!
사랑하는 아들아! 이글을 쓰기 전까지는 잘 몰랐다. 차라리 너희들의 당돌함과 엉뚱함과 순수함이 냉수 먹고 이 쑤시는 기존세대들의 가식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임을. 그러니 그 기조를 계속 유지해라! 그것이 창조의 습관이다. 결국 ‘더 배워야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마무리를 짓는구나!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너희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아빠로서 얼마나 더 겸손하게 무릎 꿇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줘서 고맙다. 사랑하는 아들들! 그래도 사랑할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할 것이다. 그럴 것이기에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아빠의 다짐이다.